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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어떤 책은 처음에 접했을 때는 별다르게 읽히지 않다가 어떤 시기, 어떤 상황과 맞물려서 전혀 새롭게, 그리고 매우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곤 한다. 내게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그런 책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72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이다. 그 책을 대학에 입학해 처음 접했다. 그때 접했던 책은 당시에는 내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인간의 비극 정도로만 읽혔다. '그렇지, 인간의 삶이란 쳇바퀴 도는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 시지프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지' 싶었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4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시지프의 신화'는 맨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4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시지프의 신화'는 맨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다. ⓒ 전영선

그렇게 느꼈던 까닭에 20대 시절을 나는 그다지 열정적으로 살지 못했다. 시간을 물 흐르듯 그냥 흘려보내며 지냈다. 주어진 일을 마지못해 하고, 사람들과도 별다른 감흥 없이 관계를 맺었다.

사는 것에 크게 의욕이 없었으므로 죽는 것에도 크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살다 늙음의 문턱에 이르는 오십이 되는 날,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감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살았다.

하지만 재밌게도, 내가 부모가 되면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다시 소망해야만 했다. 결혼 후의 오십은, 우리 집 막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나이였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기 전의 오십과 부모가 되고 난 후의 오십은 전혀 다른 나이였다. 부모로서의 오십은, 사랑을 다 하기에도 모자란 나이였다.

하루하루 별다른 감흥 없이 살아내는 삶. 그 삶이 바뀐 것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부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째를 낳고 접한 <시지프의 신화> 덕분이었다.

고단한 줄 모르고 지냈던 첫째... 둘째 땐 달랐다

첫째를 낳고 나는 꽤 행복한 주부이자 엄마였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신기했고, 그 아이가 빽빽 울어대다가도 내 품에 안기기만 하면 조용해지는 것도 신기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일 틈이 없는 나날이었지만 전혀 고단한 줄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둘째를 낳고 상황이 바뀌었다. 우선 제왕절개 후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건강이 악화된 데다, 남편이 이직을 해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바람에 매일 '독박육아', 즉 자정 넘어서까지 홀로 두 아이의 양육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면서, 하루 종일 집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했던 그 시기.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거칠게 다루며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가 두 돌을 맞이하기까지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 해도 해도 아무런 성과를 보이지 않는 무위의 고리에 빠진 듯한 무력감에 빠져 자주 '지겹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지겨움은 종종 자살에 대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둘째를 낳고서 종종 그런 충동에 휩싸였다. 당시 복도식 아파트 12층에 살고 있었는데, 복도 난간에서 어쩌다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한 발만 내딛으면 이 모든 상황이 끝나는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돌아보면, 많이 위험했다). 그 위험한 생각의 고리를 끊게 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알베르 카뮈의 책 <시지프의 신화>였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트의 왕으로, 제우스를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가 밀어 올리는 바위는 산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정말 궁금했다. 시지프는 '무익함'이라는 형벌을 어떻게 견뎠을까. 산꼭대기로 올려놓아도 번번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매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그렇게 다시 읽게 된 <시지프의 신화>.

카뮈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카뮈의 시지프는 끊임없이 돌을 올려놓아도 다시 돌이 굴러떨어지는 상황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돌을 산꼭대기로 올려놓을 때마다 자신에게 새롭게 다가드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지만, 그 운명이 숙명적이고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 있을 뿐,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한 운명은 없는 것이다. 그 외의 것에 대해 인간은 그의 일상생활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 그의 바위로 돌아오는 시지프는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기억의 눈길 아래 통일되고, 곧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연결 없는 이 행위의 연속을 바라본다.

(중략)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산의 빛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p.177~178)

그냥 흘러만 간 줄 알았는데 다 쌓여있었다

'행복한 시지프'? 이 부분을 읽다가 쿵! 마음이 내려앉았다. 하나의 세계.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에서 마주치는 낱낱의 세계에 집중하는 시지프.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은 그에게 무익함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다가드는 세계를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놓치고 지냈던 건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려 현재를 다시 돌아본다. 이미 흘러간 시간들, 아이들도 나도 없이 흘러간 그 무수한 시간들. 그 시간 속에 존재했을 나와 아이들의 세계가 성큼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아이들의 몸짓 하나하나, 눈짓 하나하나가 거대한 세계였다는 사실이 도끼처럼 머리를 다시 내리쳤다.

그제야 나로 인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 나의 눈길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 나의 운명 속에 봉인된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냥 의미없이 흘러가거나, 반드시 버텨야만 하는 하루가 아니라 발견해내는 하루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내게 와준 천사 셋 언제나 묵묵히 제 할 일을 말없이 해내는 첫째(가운데), 자상하고 온화한 성품의 둘째(오른쪽), 생기발랄 거침없는 셋째(왼쪽). 이 아이들이 내게서 났다는 사실이 종종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으로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면 언제나 신기함이 앞선다.
내게 와준 천사 셋언제나 묵묵히 제 할 일을 말없이 해내는 첫째(가운데), 자상하고 온화한 성품의 둘째(오른쪽), 생기발랄 거침없는 셋째(왼쪽). 이 아이들이 내게서 났다는 사실이 종종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으로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면 언제나 신기함이 앞선다. ⓒ 전영선

이후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다가드는 세계에 눈을 맞출 줄 알게 되었으며 어떤 순간에도 '긍정'의 마음을 잃지 않게 되었다.

최근 다시 발견한 책, 카뮈의 시지프가 내게 가져다준 값진 선물이었다.

#알베르카뮈#시지프의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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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하고 아름다운 나무 같은 사람이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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