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에 4남매가 9박11일 동안 이탈리아를 자유롭게 여행한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씁니다.[기자말] |
이탈리아 자유여행 마지막 날이다. 쌍둥이 남동생들은 외국에 살아서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데 다행히 4명 모두 저녁 비행기라 오후까지는 같이 여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인 민박집에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짐가방은 맡기고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향했다. 우리말로 성 베드로 사슬 성당인 이 성당은 로마를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전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보관하기 위해 442년에 세워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에는 미켈란젤로(1475~1564)가 교황 율리우스 2세(1443~1513)의 영묘를 만들기 위해 조각한 <모세상>이 있다. 지도 검색을 하니 성당은 우리가 묵은 테르미니역 근처에서도 걸어갈 만했다.
로마는 이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라서 거리마다 오래된 건물과 유적지로 가득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의 풍경이 로마의 매력이고 그래서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당 가는 길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바티칸과 콜로세움, 트레비분수와 판테온에서의 바글거림이 없었다. 마치 중세 시대 골목길처럼 오래된 흙담과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는 벽돌담들로 이어진 길을 지나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이 보인다.
성당의 외관은 평범했지만 내부는 거창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묶였던 사슬이 보관되어 있는 중앙 제단으로 내려가 보았다.
베드로의 사슬은 장식된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었다. 서기 67년에 베드로가 순교했으니 쇠사슬은 이천여 년 전 유물이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시간과 고난의 흔적이 쇠사슬 속에 담겨 있다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상>으로 향했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피렌체 출신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를 주문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했을 만큼 야망 군주, 전사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 그리고 20대에 <피에타>와 <다비드>를 조각해 유명해진 미켈란젤로의 만남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영묘가 거대하고 웅장한 작품이 되도록 주문했다. 하지만 교황은 영묘 작업을 중단하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것을 명령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 천장에 올라가 4년의 노력 끝에 구약성서 창세기의 장면들을 형상화한 <천지창조>(1508~1512)를 그렸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선종했고 그의 영묘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30대의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천지창조>를 역사 속 걸작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60대의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위촉을 받고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7년에 걸쳐 완성했다.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교황들의 주문으로 천장화와 벽화를 그리면서 몸과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그의 노력과 의지와 상상력으로 로마의 르네상스가 꽃피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505년에 시작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는 중단과 변경을 거듭한 끝에 1545년 완성되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놓였다. 40여 년 간 미켈란젤로에게 부담이었던 이 영묘는 처음 계획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지 못했고 교황의 시신도 안치되지 못했지만 미켈란젤로의 <모세상>만은 오백 여 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다.
십계명이 적혀 있는 석판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세상>은 인간의 몸을 사실적으로 구현해 내려는 미켈란젤로의 미 의식이 발현된 그의 3대 조각상 중 하나다. 참고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다비드>상이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간 우리는 헤어지기 전 점심을 먹으며 지난 밤 즐거웠던 시간을 반추했다. 성장한 후 각각 결혼을 하고 남동생들은 외국에 나가 살게 되었는데 3년 전 셋째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4남매가 되어 우리는 여행지에서 만났다.
여행지 숙소에서도 둘씩 방을 썼기에 넷이 한 방을 쓴 적이 없는데 이번 한인민박에서는 침대 4개가 놓여 있는 가족실에서 지내보자 했다. 어린 시절 이후 40년 만에 함께 자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격함이 지나쳐 독단적이고 일방적이었던 아버지의 훈육 방침 때문에 상처받았던 일들, 소극적이고 움츠리며 살았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이제 지천명인 남동생들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나는 같이 웃고 떠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동생들이 외국생활을 하게 된 게 아닐까. 나도 그 상처를 피하려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일찍 집을 나왔던 게 아닐까.
우리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같이 여행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경험하지 못했던 소통과 공감을 나누기 위해, 이제는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함께 추억하고 그리워하기 위해.
이번 여행에서는 열흘 동안 로마와 오르비에토, 나폴리와 카프리, 폼페이와 소렌토까지 여러 도시를 가 보고 경험했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동생들과 어린 시절 쌓지 못했던 추억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던 점, 그리고 아팠던 기억을 같이 공감하며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조그마한 위로 혹은 작은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지난 봄 동생들과의 여행을 좋은 추억의 한 페이지에 저장해 놓는다.
덧붙이는 글 | 제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