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
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나는 여름의 하늘을 조금 사랑한다.
당당하고 등등한 푸름을,
푸름을 가벼이 저버리고 소나기를 내리는 패기를,
패기를 무효하는 천진한 무지개를.
나는 여름밤을 조금 사랑한다.
흙과 풀과 낮은 끈기가 뒤섞인 냄새를,
짝을 찾는 맹꽁이의 전심전력의 소리를,
한바탕 꿈을 꾸기에 알맞은 짧음을.
나는 여름밤의 물기 많은 과일을,
헐거운 옷 속으로 들어오는 낮은 바람을,
오수에 빠진 사람과 동물의 방심한 얼굴을
조금 사랑한다.
- 한정원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중에서
겨울에 태어난 나는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다. 추위 속에 나를 감금시켜 놓고, 그 안에서 얼어붙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과 나는 늘 함께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1년 동안 필리핀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네 계절을 여름 하나로 묶어 열대의 폭양을 건너왔다. 그런데 다섯 번째 계절을 우리나라에서 다시 여름으로 살아가려니 숨이 턱까지 막힌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폭염과 열대야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한국을 탈출했다. 지난주 거주지에서 가까운 무안공항을 통해 몽골로 피서를 결행한 것이다. 직장 생활 초년 시절부터 동년배들끼리 모여 친목을 다져오던 친구들이 퇴직 후에도 주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우의를 나눠왔는데, 이번에는 아내들과 함께 떠났다.
무안에서 울란바토르를 운항하는 보잉 737-800기종은 약 18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다. 야간에 지방공항에서 운행하는 노선이라 뒷좌석이 군데군데 비어 있어 여유롭다. 이동거리 3시간 안팎의 단거리 해외여행을 인천공항까지 가지 않고 지방에서 이렇게 편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게 큰 행운이다.
말타기와 전통의상 체험 및 전통공연 관람
새벽 서늘한 기운에 잠에서 깼다. 숙소인 게르에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오스스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옷가지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서니 푸른 초원의 아침이 상쾌하게 여행객을 반겼다. 넓은 초원에는 군데군데 여행객들을 위한 캠프가 점점이 미명의 연무 속에 침잠해 있다. 여름철이라는데 우리나라의 봄이나 가을철 정도로 활동하기 좋은 기온이다.
우리가 머무는 미라지 캠프는 테를지 국립공원 내에 자리한 규모가 큰 시설이다. 사방으로 구릉과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요새를 방불케 했다. 아내와 함께 게르 촌 뒤편의 바위산에 올랐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털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키를 낮춘 채 짧은 여름 한 철을 바쁘게 사는 풀과 이끼들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전해왔다.
바위산 정상에 오르니 초원에 흩어진 캠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목민들의 거주지로 이용되던 게르가 이제는 관광객들의 숙소로 변모하여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캠프 주변과 바위산 군데군데 낙엽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푸르름을 더해줬다. 바위 위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이내 몸을 숨긴다.
여정은 넓은 초원만큼이나 여유롭다. 첫 일정은 승마 체험이다. 간단한 몸풀기 후 주의사항을 듣고 말타기를 했다. 모든 일행이 말에 올라탄 후 줄을 지어 천천히 초원을 걷는다. 말과 사람이 호흡을 맞춰 걸으며 초원의 윤슬을 만끽했다. 그 옛날 말 달리던 기마의 후예들이 우리 일행을 호위하며 뒤를 따른다.
승마 체험을 마친 후 우리는 캠프 인근에 있는 아리야발 사원에 들렀다. 라마불교 양식의 코끼리 머리 형상을 한 아담한 사원이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108계단을 올라 사당에 봉헌과 묵상을 한다.
사원을 빙 둘러 설치된 윤장대를 따라 '옴 마니 반메 훔'을 읊조리며 조국의 안위와 가족의 평온을 기원해 본다. 하산길에 비를 만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빗속에서도 우산을 받쳐 들고 거북바위에서의 기념 사진은 놓치지 않았다.
오후에는 노마딕어니스 체험으로 몽골의 전통의상과 전통차 등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곳의 의상도 우리의 한복만큼이나 아름답고 정교해 관광객들이 놓치지 않는 코스인 모양이다. 특색 있는 의상이라 모두 옷을 갈아입고 사진 촬영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다음 일정은 몽골 전통공연이다. 22년 전에 한국에서 이곳 몽골로 이주해 이민 1세대나 다름없는 미라지 캠프 대표가 사회를 맡고, 공연 사이사이에 해설까지 곁들어 줘 이해하기가 쉬웠다. 마두금, 징, 피리, 가야금, 실로폰, 기타 등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 10명의 젊은 예술가들로 구성된 악단의 전통공연이다.
특히, 자연의 소리를 닮은 몽골 허미 노래는 배와 목을 통해 두 개 이상의 음으로 동시에 발성되는 신비로운 음악이었다. 2시간 동안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박진감 넘치는 공연은 200여 명의 한국 관광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무대였다.
저녁식사 후에 예정된 별 관찰은 날씨가 흐려 보지 못하고, 캠프파이어로 대신했다. 몽골 대초원의 한가운데에서 별들이 꿈꾸는 시간을 틈타 아름다운 음악에 위스키를 곁들이며 즐기는 캠프파이어라니, 이보다 더 환상적인 하모니는 그동안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
열트산 트레킹 그리고 푸르공을 타고 대초원 무한 질주
다음 날 오전은 열트산 트레킹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1시간 코스인 초원의 구릉을 바람이 되어 바람처럼 걷는다. 한없이 맑은 코발트 빛 하늘에는 추억처럼 구름이 흘러가고, 시원을 알 수 없는 바람이 나를 스치고 끝없는 초원으로 내달린다. 쑥부쟁이와 같은 들꽃들이 초원의 풀밭 사이에서 키를 낮추고 해바라기에 여념이 없다.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이들을 위해 소리 없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제작된 승합차 푸르공을 타고 초원을 질주한다. 평화로운 초원에 무법자가 된 것 같아 미안하다. 말 달리던 초원에 푸르공이나 모터사이클이 대신하고 있으니, 이젠 초원에서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되진 않길 바랄 뿐이다.
오후에는 울란바토르 외곽의 청진벌덕에 세워진 징기스칸 기마상을 관람했다. 오래전 징기스칸의 황금채찍이 발견된 곳에 세워진 기마상은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맞아 높이 40m에 250t의 청동으로 2010년에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큰 기마상이라고 한다. 1층 내부에 들어서면 250마리의 소가죽으로 만든 기마용 장화인 고틀과 말 채찍이 전시되어 있다.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말머리로 올라가면 말의 갈기 부위가 전망대 역할을 한다. 기마상이 향하고 있는 푸른 초원은 징기스칸의 고향인 수흐바타르다. 기마상의 웅장함에 놀랄 만도 한데, 넓은 초원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동상이라 그 위용이 그다지 대단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간등사원과 몽골국립박물관 관람
오늘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진행되는 일정이다. 오전에는 티베트 불교의 중심적인 절이자 몽골 3대 불교 사원 중 하나인 간등테크칠링 사원에 들렀다. 고찰과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고 있는 대사원이다.
승려들이 독경하는 법당 안을 현지인과 관광객이 적당히 어울려 관람을 하거나 봉헌을 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지 않고 정겹다. 사원이 깊은 산속에 은거하지 않고 이렇게 속계에서 중생들과 함께 깨우쳐 나가는 것이 진정한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오후에는 몽골국립박물관에서 몽골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제1전시실부터 제9전시실로 구성된 박물관은 실별로 시대를 구분하여 선사시대부터 1990년대 민주개혁 시기까지 구분해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인근 수흐바타르 광장(징기스칸 광장)으로 옮기니 마침 음식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빈대떡과 호떡을 맛볼 수 있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울란바토르역으로 이동해서 헝허르역까지 기차여행을 했다. 이 코스는 몽골 종단열차의 일부 구간이며,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울란우데역을 만날 수 있다. 대륙의 열차는 장거리 여행객이 많아 좌석 위에 침대를 갖추거나 침대칸을 운영하고 있다. 1시간의 열차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야간비행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길지 않은 여행이 꿈결처럼 지났다. 대평원 위의 풍경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리데, 그 좋은 감정을 울란바토르에 들어가서 다 망쳤다. 350만 명의 몽골 인구 중 170만 명이 울란바토르에 몰려 살고 있어서 차량정체에 따른 매연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회적 낭비와 부작용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몽골을 찾는 우리나라 방문객은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 번째이며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는데, 이런 문제는 관광객 유치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수직적 사회구조와 문화에 익숙한 우리와 달리 몽골은 수평적 사고와 문화가 사회생활의 전반에 깔려있다고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상하 관계가 아니고 동지이며 친구이고 조력자이다. 지식은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멀리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삶도 먼 곳을 보며, 다른 것을 체험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많은 것을 눈에 담고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