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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데 가는 곳마다 현대, 기아차... 여긴 어디? https://omn.kr/29xl1 에서 이어집니다.
천산과 눈 맞춤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낮게 내려앉은 흐린 구름 사이로 천산이 환히 빛난다. 서울은 아직 불볕더위라는데 알마티에서 맞는 서늘한 아침이 고맙다. 매일 아침을 천산과 함께 하는 이들은 어떨까. 때 묻지 않은 현지인들의 순박한 심성 속에 천산이 들어앉았다. 오늘은 도심을 벗어나 순정한 자연과 만난다.
오길 잘했다, 아씨 고원
아씨Assy 고원과 콜사이Kolsai 호수, 차른Charyn 협곡은 국립공원이다. 거친 바람이 매만진 광활한 초원과 만년설이 녹아 이룬 손 시린 호수, 그리고 오랜 시간 물과 바람이 빚은 붉은 협곡. 알마티를 찾는 이들은 이곳에서 자연의 위대함과 자연의 고귀함을 동시에 경험한다. 누구라도 압도적 풍광에 마음을 열고 하늘을 우러른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양옆으로 황량한 벌판이 끝도 없다. 막막하다는 말도 모자란다. 감동적인 것은 수백km를 달려도 천산산맥이 수호신처럼 따라오는 것이다. 그 산맥을 중심으로 국경이 나뉘고,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어 삶을 꾸리고 있다. 우리는 김제 평야를 유일한 지평선이라며 호들갑떨지만 카자흐스탄에서는 사방이 지평선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고 했던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며 달렸다. 드디어 아씨 고원으로 오르는 투르겐Turgen 국립공원에 들어섰다. 이곳부터는 비포장 산길이다.
아씨 고원은 해발 3000m에 비단처럼 펼쳐있다. 흙먼지를 피우며 40여 분 산길을 올랐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청량한 계곡물 소리가 포효했다. 이런 곳에 평원이 있을까 하고, 조바심을 낼 즈음 거짓말처럼 시야가 활짝 열렸다.
이름도 어여쁜 아씨 고원이다. 유려한 능선과 툭 트인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스라한 산맥은 키르기스탄, 타지키스탄으로 아스라하니 이어진다. 말과 양, 소 떼, 그리고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흰색 게르가 구름처럼 떠 있다. 초원에 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야생화 향기와 멀리서 달려온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났다. 순간, 오기를 잘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상에서 유목민 아이들을 만났다. 붉은 볼을 어루만지고 꼭 껴안아줬다. 가난의 대물림이 그들에게서 멈추고, 천산에서 키운 고운 심정이 빛바래지 않았으면 했다. 이방인의 부질없는 감상이다.
능선을 타고 한 시간여를 걸었다. 내려오는 도중 갑작스러운 비를 만났다. 고원에서 맞는 비는 차갑지 않고, 오히려 반가웠다. 초원이라 시야가 확보됐기에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아름다운 초원은 막상 걸어보니 온통 말똥, 소똥으로 뒤덮인 지뢰밭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는데 내게는 아씨 고원이 그랬다. 그래도 걷기를 잘했다. 비를 맞으며 걸은 아씨 고원은 벅찬 감동이었다.
다른 행성에 도착한 환상
다음날은 영화 <스타워즈>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 차른Charyn 협곡으로 갔다. 알마티에서 동쪽으로 220km 떨어진 차른 협곡은 놀라운 풍광을 선사한다. 1200만년 동안 침식과 풍화를 반복한 끝에 형성된 협곡은 다른 행성에 도착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용암과 화산 석으로 뒤덮인 협곡은 만년설과 바람이 빚은 걸작이다. 아득한 시간을 아로새긴 협곡은 예술 조각품과 다름없다. 전체 길이만 154km에 달하며, 관광객을 위해 2.5km를 개방했다.
협곡 바닥을 따라 걷는 1시간 내내 감탄사를 멈출 수 없었다. 몇 그루 남지 않은 물푸레나무에서 한때는 이곳이 광대한 숲이었음을 짐작한다. 이제 이곳의 주인은 도마뱀과 사막 여우, 사막 토끼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늦은 오후 5시라 황홀한 일몰을 만났다. 협곡 너머로 스러지는 석양은 바위 계곡을 주황색, 진홍색, 붉은색으로 시시각각 물들였다.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차른 강이 흐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듯 강폭 넓은 차른 강은 비현실적이었다. 강물에 손을 담고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지를 돌아봤다.
차른 협곡을 출발해 '천산의 진주'로 불리는 콜사이Kolsai 호수로 발길을 돌렸다. 접근이 어려운 아씨 고원과 달리 호수 앞까지 포장도로가 난 덕분에 콜사이는 인파로 북적였다. 천산산맥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콜사이는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하담(1,800m), 중담(2,250m), 상담(2,800m)까지 세 개 호수가 늘어서 있다.
기후 재난을 확인하다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은 맨 위 호수까지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는다. 대부분은 맨 아래 호수 주위를 돌다 돌아간다. 나도 하담 주변을 걷다 왔는데 별다른 감흥은 없다. 호수보다는 호수로 가는 내내 만난 광활한 초원에서 받은 감흥이 더 컸다. 하늘과 초원, 천산이 맞붙은 풍광은 선명한 감동이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전 모습이 저랬을까 싶다.
떠나는 날 아침, 숙소에서 가까운 침블락 산에 올랐다. 해발 3200m 침블락은 케이블카를 타고 1시간여 올라야 한다. 신령이 깃든 천산天山을 두 발이 아닌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는 게 불경스러웠다. 허나 일정이 바듯한 여행객 입장에서 문명의 이기에 감사했다. 잔뜩 기대하고 오른 침블락에서 만년설을 보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초라한 빙하를 통해 이곳이 천산산맥 자락임을 헤아릴 따름이다.
말 그대로 침블락에 올 때마다 만나고 봤던 만년설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이상기후와 온난화 재앙이 천산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수년 전만 해도 침블락에서 만년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감탄했는데, 이제는 상상 속에만 남겨둬야 한다. 이대로라면 천산과 알프스, 히말라야 만년설은 물론이고 극지방 빙하까지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그때 인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재난 영화가 아니라도 이미 지구촌은 곳곳에서 혹독한 기후 재앙을 겪고 있다. 이제라도 자연과 공존을 실행에 옮겨야하는데 그럴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초원과 만년설을 동경해 떠난 알마티 여정은 자연이 주는 벅찬 감동에 취한 동시에 기후 재난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알마티를 떠나며 푸른 초원과 눈부신 만년설이 계속되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임병식 한양대학교 갈등연구소 연구위원(전 국회부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