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멍덕'이란 게 있습니다. '멍석'은 들어 봤어도 '벌멍덕'을 들어보긴 처음이라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꿀벌 농사를 한 적 없는 분들에겐 낯선 명칭이겠지요. 더욱이 꿀벌 농사를 하였더라도 '양봉(서양종 꿀벌)'을 한 분이라면 벌멍덕을 모르실 수 있습니다. 벌멍덕은 주로 한봉(토종 꿀벌)에 쓰이니까요.
위 사진에 보시다시피 벌멍덕은 마치 고깔모자처럼 생겼습니다. 다만 지푸라기를 두 손으로 꼬아 만듭니다. 아버지께서는 사십 대 후반경부터 한봉을 키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제 고향은 동네 안쪽에 깊은 산골짜기와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드물지만 한봉이 분봉해 동네까지 날아오는 일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분봉해 날아온 벌을 받아다 꿀벌 농사를 시작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한봉은 1년 한두 차례 꿀을 땁니다. 양봉에 비해 꿀이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기에 꿀벌 농사꾼 중에 한봉을 하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한봉을 하신 덕분에 제겐 저 벌멍덕이 익숙합니다.
벌멍덕의 쓰임새는 분봉(分蜂 여왕벌이 새 여왕벌에게 집을 물려주고, 일벌의 일부와 함께 따로 새집을 만드는 일)하여 나뭇가지 따위에 붙은 벌 무리를 멍덕 안으로 유인해 벌통으로 옮길 때 사용합니다.
벌멍덕에 꿀을 바르고 쑥 따위로 조심스레 벌들을 그 안으로 밀어 넣으면 벌들이 그 꿀이 발라진 아늑한 빈 공간에 들어갑니다. 물론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들에게 쏘이지 않도록 벌망 같은 안전장구를 갖추고 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벌멍덕처럼 생긴 플라스틱 바가지 따위를 사용하면 되지 않는지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되긴 할 겁니다. 하지만 지푸라기 벌멍덕만큼 효과는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벌들은 지푸라기로 짠 벌멍덕을 좋아한답니다. 지푸라기 자체가 자연에서 자라난 식물이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는 저 벌멍덕을 며칠 동안 손수 짜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농업 박물관 같은 데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버지가 얼마 전 벌멍덕을 짜신 까닭은 큰형네 아파트에 분봉한 한봉이 날아와 머물곤하기 때문입니다.
큰형네는 아파트 맨 윗층에 사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담양 병풍산이 있습니다. 아마 병풍산에서 분봉한 한봉이 큰형네 아파트를 중간 기착지로 여겨 그곳에 머물다 날아가곤 하나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벌멍덕을 마련하신 겁니다.
아버지는 올해 구순이십니다. 그 연세에 지금도 벌멍덕뿐만 아니라 짚신 따위는 손쉽게 만드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짚신은 어려서 늘 직접 만들어 신었고 벌멍덕도 젊은 시절 만들어 사용하시던 꿀벌 농사 도구이기 때문에 손에 익으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처럼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신이 사용할 물건을 직접 정성껏 만들어 썼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상품을 재빨리 사서 쉽게 싫증내 버리는 건 어쩌면 자신이 만든 게 아니어서가 아닐까요? 아버지가 별세하시면 직접 제작하신 벌멍덕은 가보(家寶)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