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처음 사용한 건 고3 때였다. 2000년 4월에 출시된 그 당시 최고, 최신 휴대폰인 S사의 '애니콜 듀얼 폴더폰'이 6월에 내 손에 들어왔다. 한 살 많다고 해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뿐인 오빠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무려 서울까지 가서 사 온 선물이었다.
삐삐도 없던 내게 휴대폰이라니. 스마트폰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감처럼 단순한 기능뿐이었지만 휴대폰 액정이 밖에도 있어서 폴더폰을 열어보지 않아도 시간이나 문자 온 걸 알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혁신이었다.
S사의 듀얼폰에 '011'로 시작하는 S통신사 조합은 요즘 말로 휴대폰 계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지금은 모든 전화번호가 010으로 시작하지만 그때에는 통신사에 따라 011, 016, 017, 019 등 고유번호가 있었다.) 아무튼 귀하디 귀한 신문물 영접으로 한동안 '어깨뽕'을 잔뜩 채우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휴대전화에 관한 건 아니다. 빵집에서 빵을 산 이야기인데 휴대폰과 빵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면 바로 통신사 멤버십 할인이 그 연결고리이다.
평소처럼 빵을 사고 난 뒤에 할인되는 멤버십이 있느냐고 직원이 물었고 나는 "네!" 하며 휴대폰으로 S통신사의 멤버십 앱을 열었다. 1,100원 할인을 받았고 21,000원을 결제했다. 그날따라 'VIP등급이 되시면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아서 몰랐던 나의 할인등급도 알게 되었다, 'silver'였다. 24년 동안 S통신사를 이용하면서 한 번도 다른 통신사로 갈아 타본 적이 없는데 골드도 아니고 실버라니. 낮은 등급을 인지하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첫 휴대폰 이후 애니콜 등 S사의 휴대폰을 10년 정도 사용하다가 '사과'폰으로 바꾼 지 10년이 넘었는데 통신사 만은 여전히 S사를 이용 중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멤버십 체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통신사를 다른 회사로 바꾸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건만 쉽게 해지하고 싶지 않은 건 또 무슨 심리일까.
띵띵띠링띵~ , S통신사 시그니처 통화 연결음의 경쾌함 때문인지, 원래 한번 정을 들이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성격 때문인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S통신사의 '멤버'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냈다(휴대폰 앱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통신사에서 발급해주는 멤버십 카드를 지갑 한켠에 '고이' 모시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나는 스포츠맨십, 리더십처럼 '멤버십' 역시 존중해야 할 소중한 가치인 것처럼 느껴왔다. 그래서 혜택의 폭이 좁아지고, VIP(한때는 비싼 요금을 썼었다.)에서 골드, 골드에서 실버로 등급이 떨어질 때에도 나는 여전히 S텔레콤의 멤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S텔레콤의 VIP가 되려면 우선 가입 후 2년이 지나야 하고 3-5년까지는 연 90만 원 이상의 요금을 내야 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가입자는 기준이 조금 완화되어 60만 원 이상 요금을 납부하면 VIP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다음은 골드(금) 등급. 나는 연간 36만 원 이하의 요금제를 사용하므로 실버(은) 등급이다. 실버 아래 브론즈(동) 등급은 없었다. 가장 아래 등급의 멤버였던 거다.
영화 무료 감상을 비롯한 각종 혜택은 사라진 게 아니라 특정 등급에만 제공되고 있었다. 빵집에서 빵을 살 때 할인해주는 금액도 차이가 났다. 어쩐지 빵을 살 때에도 할인되는 금액이 얼마 안 되더라니. 기업 경영의 최고 가치를 이윤으로 본다면 ' 저렴이' 요금을 이용하는 나 같은 사람은 기업의 중요 타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데 서비스를 사고파는 행위도 사람 사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S텔레콤을 이용하기에 부모님도, 부모님의 옆옆집에 사는 엄마 친구도(내가 같이 가서 가입해 드렸다), 내 아이도 모두 S텔레콤을 사용하고 있다. 오래된 고객을 단순히 요금제로 선을 그어 홀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기업이 신규 고객, 비싼 요금제를 사용하는 가입자에게 눈이 가는 건 당연하다. 원래 새롭고(신규 고객) 반짝이는(비싼 요금제)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니까. 고객 입장에서도 언제나 유혹은 있다, 통신사를 이동하면 최신 휴대폰이 공짜라느니, 요금이 얼마라느니. '이 참에 옮겨볼까?'하고 흔들린 적도 있지만 내 선택은 언제나 S텔레콤이었다. 충성은 오래된 진심에서 나온다.
가입 기간 30년이 넘으면 요금제와 관계없이 VIP가 된다고 한다.(20년으로는 충성심을 증명하기에 모자란 모양이다.) 이제 6년만 지나면 VIP가 되는데 확고했던 마음이 이제 와서 무너지고 있는 건 단지 내가 실버 등급이라서, 빵집 할인이 조금밖에 안 돼서 만은 아니다.
떠들썩한 소송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함께한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기업 최고 경영자의 가치관과 장기가입 고객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기업의 가치관이 어쩐지 같은 맥락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 S사의 기업 총수는 떠들썩하게 이혼 소송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의 총수는 흔한 구성원 한 명, 개인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그의 행동이 기업 이미지와 가치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파장도 크다.
부부의 이혼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타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이혼 사유가 외도일 때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접근한다. 외도는 성격 차이나 경제적 문제와 달리 사회가 지켜야 할 기본 가치, 이를테면 믿음이나 존중을 심각하게 훼손하기에 공적 영역과 교집합을 가진다고 봐서다. 사람들이 외도를 저지른 유책배우자를 종종 비난하는 이유이다.
이혼 과정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혼인 관계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동거인과 혼외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는 그의 당당함에 놀라고, 그럼에도 불매 운동이나 주가 폭락 등과 같은 오너 리스크 없이 잠잠한 사회적 분위기에 한 번 더 놀라게 되는 요즘이다. 기업인의 도덕적 해이 쯤은 별일도 아니라는 걸까.
같은 무게의 잘못이라도, 힘이 있고 없고의 유무, 어쩌면 힘 없는 개인에게 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 요즘인 것도 같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동경이든 비난이든 사람들은 그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주목하고 반응한다. 이혼 소송이니 횡령이니 하는 소란한 이슈보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회지도층의 좋은 뉴스와 선한 모습을 뉴스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대기업 회장의 불륜은, TV 속 드라마에서 보는 걸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