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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살화를 샀다. 발에 맞나 신어보는데 8세 막내가 묻는다. "왜 맨날 엄마 신발만 사?" 그러고 보니 최근 4개월간 러닝화 세 켤레에 풋살화까지 네 켤레나 샀다. 나로서도 이런 적은 처음이지만 변명처럼 답한다.

"축구를 하려니 축구화가 필요해서."
"뭐어?? 엄마 축구해??!!"

오랜 세월 '인간은 안 모일수록 좋다.'라고 내심 생각해오던 '초개인주의자'가 축구에 푹 빠지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입단 첫날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을 나에게 그녀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호언장담했던 "첫 반년을 넘긴 사람들은 평생 축구 못 그만둬요. 이거, 기절해요."라는 말 그대로 축구가 갖고 있는 매력도 어마어마했지만, 축구공과 축구하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보낸 시간들은 축구를 통해 세상의 어떤 틈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ㅡ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267쪽

"축구가 최곱니다. 난 축구에 적당히 미쳐있는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대단히 미-췬 여자들만 있어요."
ㅡ유튜브 '하말넘많'의 강민지, <ENFP는 절대 하면 안 되는 운동>

지난 주말 7일, 동네 여자축구팀의 훈련에 다녀왔다.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러니까 내게 축구란 양궁 같은 것으로서, 국가대항전(주로 월드컵), 그마저도 16강전 이상쯤은 되어야 보는 스포츠다.

K리그도 프리미어리그도 안 보고, <골 때리는 그녀들>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무튼, 술>을 읽고 김혼비 작가에게 홀딱 반해서, 그가 쓴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도 어쩐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첫 저서라 혼이 담겨 있을 텐데.

일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돌아보자. 어쩌다 노해원 작가의 <시골, 여자, 축구>를 손에 들게 됐고, 시골에서 여자들이 축구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아줌마들'이 '운동'을 하는 이야기에 감명받은 것이었다.

그 무렵 본 '하말넘많'의 영상에서, 강민지님이 말의 내용을 체현하듯 축구에 대한 사랑을 미친 사람처럼 외쳤을 때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우리나라에서 30대 이상 일반인 여자가 축구를 몇 년씩 한다는 건 웬만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 될 일 같은데.

축구나 야구, 농구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종종 봤다. 하지만 팬으로서 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중에, (혹은 그 외에라도) 직접 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다 해도(왜 없겠는가?), 장소나 여건은 둘째 치고 팀스포츠이기 때문에 일단 사람이 모여야 하고, 또 그만큼의 여자들이 겨룰 상대팀으로 있어야 제대로('축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굴러간다.

물론 혼자서 달리기나 요가 같은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헬스장에서 PT를 받거나 학원에 등록해서 무엇이든 꾸준히 배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모든 조건들을 기어이 갖추고 여자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고?(생각보다 많이 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시골, 여자, 축구>의 주인공 여자축구팀이 창단될 때 필독서라고 꼽은 책이자,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여자 축구에 관한 책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천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가 썼듯이,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네 번쯤 크게 웃었고 세 번쯤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수를 채우기도 전에 마을카페에 '여자축구'를 검색해서 오래된 글 하나를 찾았다.

내가 달리기를 할 때 늘 지나가는 코스에 야외 체육시설이 있는데(나는 그때까지 입구 표지판만 보았고, 실제 입구는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거기서 연습한다고 했다. 일단 가보기로 하면서, 준비물은 풋살화뿐이라는 말에 풋살화를 고르면서 마음이 널뛰었다. 설레기도 하고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꿈을 깨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축구는 처음이세요?" "네!" "완전 처음?" "네!!"
 "축구는 처음이세요?" "네!" "완전 처음?" "네!!"
ⓒ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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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축구한대!!!"

셋째가 동네방네(그래봤자 우리집의 이 방 저 방) 소리쳐서 첫째와 둘째도 와서 구경했다. 화장대 근처에서 나름 몰래 신어보고 있었는데... 일단 한 번 가보려는 것일 뿐인데... 뭔가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이라기보다, 등 떠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들 앞에서 축구경기를 뛰어봐? 여자인 너희들도 축구할 수 있다고 먼저 보여줘 봐? 하지만 아이의 결론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 엄마. 축구 꼭 해야 돼? 달리기도 하고 요가도 하고 축구까지 하면 어떡해? 엄마를 볼 시간이 없어지잖아." 이런 눈물나는 멘트에 미처 눈물이 생성되기도 전에 막내가 한 마디 덧붙인다. "그럼 달리기는 쉬는 게 어때?"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모험에 발을 들이민 건 '나는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때문인 걸. 정말이지 그거 하나 믿고 뛰어들었단 말이다.

"나 전부터 남자들이 너무 부러웠거든! 남편도 조기 축구를 그렇게 재밌게 다니고 아들은 뭐 클럽 축구? 요즘은 조기 축구보다 더 세련돼 보이는 그런 게 또 있대? 아무튼 그걸 재밌게 다니고. 나도 어렸을 때 편 갈라서 공으로 하는 운동 너무 좋아했단 말이야. 잘하기도 했다? 근데 여자들은 졸업하고 나면 그런 걸 할 기회가 전혀 없잖아. 그냥 집 근처에서 배드민턴 치고 헬스 가고 그러는 게 다지. 아니, 근데 나 같은 여자들도 축구를 하고 있다잖아?! 완전 놀라 버렸어! 내가 정말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좁은 세상에서 일만 하고 있었구나 싶고, 막 두근두근하더라고. 좀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소린데, 그래 내가 이걸 그동안 그렇게 기다려 온 거였구나 싶었어."
ㅡ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235-236쪽

어느 날에 나도 '미숙 언니'처럼 축구를, 혹은 다른 무언가를 그동안 기다려 왔다고 할지 모르겠다.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게 있던 사건들을 주욱 엮어보면서 달리기가 아주 쓸 만한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 알 수 없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더욱 탄탄히 달리기를 해나가야지. 그렇지 않니, 딸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회의 맛을 보고 조금은 휘청거렸다. 그럴 때 나를 다시 세워주는 달리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회의 맛을 보고 조금은 휘청거렸다. 그럴 때 나를 다시 세워주는 달리기.
ⓒ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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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달리기#여자축구#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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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 일진. 세 아이를 키웁니다. 육아 집중기 12년이 전생 같아서, 자아의 재구성을 위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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