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한민국 곳곳에 숨겨진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발로 직접 걸으며 발견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문화유산 애호가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전해드립니다.[기자말]
 신륵사 다층석탑을 둘러 보는 탐방객
 신륵사 다층석탑을 둘러 보는 탐방객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
§ 주소: 경기 여주시 신륵사길 73
§ 대표 문화유산: 신륵사 조사당,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이상 보물) 극락보전, 극락보전 삼장보살도(이상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 탐방일: 24. 6. 18.

- ①편 '극락보전을 세운 왕실의 뜻을 생각하다'에서 이어집니다.

석탑 그리고 대리석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마주한 채 서 있다가, 몸을 뒤로 돌려 석탑이 있는 마당을 바라본다. 앞서 보았던 독특한 전탑에 이어, 안마당에도 개성 넘치는 석탑이 있다. 지붕돌(옥개석)이 유난히 짧아, 마치 갓 태어나 몸뚱이에 비해 날개가 턱없이 짧은 아기 새를 떠올리게 하는 탑이다. 극락보전 기단에서 내려와 석탑 앞으로 이동한다.

 극락보전에서 바라 본 신륵사 다층석탑
 극락보전에서 바라 본 신륵사 다층석탑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석탑은 8층 정도로 보이고, 지면에서 하늘로 향하는 상승감이 크진 않다. 기단은 두 부분으로 만들어져있고, 탑신부는 장식이 거의 없어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훨씬 두드러진다. 이 다층석탑은 언제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석탑을 언제 조성했는지 관련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조선 성종대 신륵사를 대대적으로 손 볼 때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뿐이다.

가까이서 본 석탑의 표면은 한층 더 독특했다. 흔히 오래된 석탑이 지닌 잿빛 검정과는 달리, 신륵사 다층석탑은 흰색 바탕에 거뭇거뭇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은 마치 새똥이라도 묻은 것처럼 착각할지도 모른다. 이 석탑은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기에 독특한 무늬가 남아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물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름처럼 생긴 대리석의 결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보존과학연구>(1995)에 따르면, 이 다층석탑의 대리석은 "결정질 석회암 또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졌"고, 충북 수안보 인근 향산리층에 있는 유사한 대리석이라고 한다.

 대리석 특유의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
 대리석 특유의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신륵사 다층석탑 앞에서, 아이패드 미니를 들고 살짝 멈칫했다. 눈동자만 움직여 탑과 아이패드를 번갈아 훑었다. 몇백 년 된 석탑과 최신 IT 기기인 아이패드가 한 장면에 함께 있다니, 뜬금없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탑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왔겠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로 모든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탑도 한때는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새로운 건조물이었겠지.' 지금의 나처럼, 당시 사람들도 이 탑을 보고 감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석탑도 그 시대에는 최첨단이었다는 점에서 내 손에 들린 아이패드와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다.

 옥개석이 군데군데 깨져, 마치 갓 태어난 아기 새의 작고 여린 날개 같다.
 옥개석이 군데군데 깨져, 마치 갓 태어난 아기 새의 작고 여린 날개 같다.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탑 접근을 막는 난간이 있어 탑을 자세히 살펴보기 어려웠다. 습관적으로 아이패드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기단부를 확대해보니, 정사각형으로 다듬어진 돌(갑석)의 모서리에는 연꽃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기단 면석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되어 있었다. "우와, 진짜 정교하네!"라고 감탄했지만, 곧 이상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아이패드 속에는 눈앞의 탑이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카메라는 한 치의 실수 없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그 차갑고 무미건조한 이미지로는 눈앞에서 느껴지는 질감과 무게감이 전달되지 않았다. 전자 화면 속은 탑의 현재를 충실히 기록했지만, 탑이 오랜 시간 품어 온 매력은 렌즈 너머로 다 담기지 않는 것 같았다.

석탑 속 운룡(雲龍)과 파도

아래쪽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가장 아래쪽 받침 부분(하대면석)을 보면 고사리가 같기도 하고, 갈고리 같기도 한 구불구불한 무늬가 좌우로 늘어져 있다. 어떤 무늬 같은가? 정답은 파도 무늬이다.

경기불교미술연구소 김훈래에 의하며 이 무늬는 이전 시대의 석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륵사 다층석탑만의 고유한 무늬이다. 불교에서 파도가 상징하는 바는 <묘법연화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서원(다짐이나 맹세)을 바다에 비유하고 있다.

 기단에 파도 무늬가 있다. 현장에서 보면 생각보다 뚜렷하게 보인다.
 기단에 파도 무늬가 있다. 현장에서 보면 생각보다 뚜렷하게 보인다.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윗 기단으로 시선을 옮겨 보자. 구름 속을 뛰어노는 용이 양각되어 있다. 네 면에 용이 한 마리씩, 총 네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새도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김훈래는 고려 시대까지 사각 평면을 가진 석탑에서 운룡무늬를 거의 찾아 보기 힘들었는데, 조선 초기에 들어 다시 나타난 사례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단부에 조각된 운룡. 머리 부분은 깨어져 떨어졌지만 몸과 5개의 발톱이 명확히 보인다.
 기단부에 조각된 운룡. 머리 부분은 깨어져 떨어졌지만 몸과 5개의 발톱이 명확히 보인다.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기단부에 올려져 있는 탑신부도 찬찬히 살펴보자. 탑신부의 첫인상은 두꺼운 지붕돌과 얇은 옥신이 주는 대비에서 비롯된다. 옥신은 간단히 말해 지붕돌과 지붕돌 사이에 위치한 몸체 돌인데, 그 두께가 옥개석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눈으로 옥신과 옥개석을 번갈아 따라가다 보면, 탑이 마치 촘촘한 퍼즐처럼 맞물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한 층의 옥신과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기단의 화려함과 달리, 몸돌은 과장된 장식 하나 없이 단조롭고 절제되어 있다. 만져볼 순 없지만, 매끈하게 다듬어진 옥개석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네 귀퉁이가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해 살짝 솟아 있다. 상승감이 덜 한 이 석탑에 은은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미완이 남긴 상상의 미학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대리석 석탑은 단 세 개뿐이다. 서울의 원각사지 십층석탑, 개성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그리고 여주의 신륵사 다층석탑이 그 주인공들이다. 대리석 특유의 맑고 우아한 질감은 이 석탑들에 특별한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신륵사 다층석탑 역시, 과거에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 고유한 독창성을 뽐냈을 것이다.

 현존하는 3개의 대리석 석탑
 현존하는 3개의 대리석 석탑
ⓒ 공공 이미지(좌, 우) / 박배민(중앙)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색이 바래고, 일부가 깨어져 옛날의 모습을 완벽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대리석이 빛났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당시의 신륵사 석탑도 경천사지나 원각사지 석탑처럼 웅장하고 세련된 자태를 자랑했을 것이 분명하다. 세 석탑 모두 각기 다른 장소에서 수백 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각자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강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신륵사 다층석탑
 강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신륵사 다층석탑
ⓒ 박배민

관련사진보기


이 석탑은 현재 8층까지만 남아 있지만 전문가들은 본래 8층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훈래는 자신의 논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연구>(2013)에서, <조선고적도보>(1920년대), 1970년대 사진, 1995년 실측 보고서를 종합 비교하여 다층석탑이 본래 13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석탑의 각 부재의 비율을 고려했을 때, 9~11층이 사라졌을 것으로 비정하고 현재 7, 8층은 원래 12층, 13층 지붕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만약 13층이 온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상승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명확히 확인할 길이 없어, '다층' 석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꼭대기에는 철심으로 보이는 것이 날카롭게 서 있는데, 몸돌을 고정하는 심지였는지, 무언가를 장식하기 위한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신륵사 다층석탑 (1930년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신륵사 다층석탑 (1930년대)
ⓒ 국가유산 지식이음 자유 이용

관련사진보기


그러고 보니, 신륵사의 대표적인 두 탑은 정확한 층수를 알 수 없어 '다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층수가 명확하지 않아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층수를 확정할 수 없는 전문가들의 고뇌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모호함이 유산을 바라보는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자극하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미완성이라는 것은 때로 완벽함보다 더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신륵사 다층석탑 역시 우리의 상상 속에서 그 옛날의 빛나는 모습을 재현하며, 영원히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 신륵사 편 끝.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채널(브런치 등)에도 실립니다.참고문헌
김훈래,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연구」, 2013
여주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정밀실측조사 보고서」, 2015


#신륵사#다층석탑#대리석석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이 남긴 흔적을 찾아 다닙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