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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토란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넨다. 환한 보름달처럼 풍요로움이 흘러넘치는 명절 추석이지만, 늘 거슬리는 오점이 하나 있었다.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가족들의 오지랖과 잔소리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 바로 소고기 국인 척 하지만 실은 토란인 것. 토란이 듬뿍 들어간 외할머니표 '토란국'이 내겐 그랬다.

설날엔 보드라운 떡국을 몇 그릇이고 해치울 수 있지만, 추석에 먹는 토란국은 어쩐지 한 입 넣기 전 망설이곤 했다. 포근하고 고소한 감자처럼 보여 한 입 베어 물도록 현혹하는 토란.

 토란국 사진(자료사진), 유튜브 화면갈무리
토란국 사진(자료사진), 유튜브 화면갈무리 ⓒ 유튜브 심방골주부

하지만 씹으면 곧바로 '아차' 싶은 미끌미끌한 식감과 밋밋한 맛은 미간을 찡그리게 했다. 절대 편식하지 않던, 착실한 어린이였던 나에게 토란은 비겁한 악당과 같았다. 추석마다 유난히 토란국을 먹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기 일일이 까고 삶아야 하는 기, 이기 보통 일이 아니래이."

웃으며 말하는 외할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도 내 앞 가득 담긴 뽀얀 정성들을 울적하게 내려다보곤 했다. 국 안에 토란이 몇 개나 들었나 숟가락으로 세어 절반 이상 엄마 그릇에 몰래 넘기고, 나머지는 한 번에 씹어 삼키려고 했는데... 역시나 입 속의 미끄덩한 느낌이 영 꺼림칙했다.

이걸 대체 왜,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저 맛있게 먹고 있는 어른들도 실은 모두 '맛있는 척'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여름 지나 갑자기 서늘해진 추석 공기만큼이나, 늘 미스터리하게 느껴지던 토란.

일일이 껍질 까고, 다듬고 삶고... 가족 위한 정성

 어릴 땐 궁금했다. 사람들은 정말 맛있어서 토란을 먹는 걸까?
어릴 땐 궁금했다. 사람들은 정말 맛있어서 토란을 먹는 걸까? ⓒ pixabay

이전에 일 년에 한 번, 추석에만 토란을 만나다가 상황이 변했다. 서울 중심에 위치해 명절마다 유난히 고요한 지하철을 타고 갔던 외할머니 집 위층으로 가족들이 이사를 간 것.

그 덕에 우린 대가족이 되었고, 특히나 "할머니표 들깨 토란국을 먹을 때마다 몸보신이 되는 것 같다"는 엄마의 진심어린 감탄 덕분에 토란국의 등장이 점점 잦아졌다.

이젠 나도 성인이라 토란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좀 늘 어딘가 기분이 찝찝했다. 거실에 앉아 수북하게 쌓인 토란을 종일 다듬고 계신 외할머니의 까만 손을 봤기 때문일까.

옆에서 지켜본 외할머니의 음식은 전부 특별했다. 재료 하나 허투루 사지 않고 잔뜩 굽은 허리로 중앙 시장과 중부 시장을 누비며 최상품만 사 오셨는데, 엄마가 어렸을 때는 새벽마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다니며 가장 싱싱한 것들만 잔뜩 지고 오셨다고 했다.

1932년생 외할머니는 구십이 훌쩍 넘으신 나이인데, 요즘에도 옥상에 꾸린 텃밭에 사다리를 타고 오가며 상추며 고추, 가지 등을 기르시는 모습을 본다. 그런 활력과 정정하심을 볼 때면 어느 땐 경이롭기까지 했다.

 할머니가 직접 수확해서 말린 고추
할머니가 직접 수확해서 말린 고추 ⓒ 조성하

몇 년 더 흘러 나는 결혼을 했고, 남편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구성원이 늘어난 우리는 전보다 더 커진 대대(大大)가족이 되었고, 명절이 되어 나의 동반자도 드디어 외할머니의 토란국을 접하는 날이 왔다.

배우자가 식감에 다소 예민한 편이라 곱창, 닭발, 가지 등등 물컹한 음식은 손도 대지 않는데, 이 미끄덩한 토란을 먹자마자 뱉진 않을까 은근히 초조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가 종종 하던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거 정말 보양식이야, 한 번 먹어봐".

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레 한 입 떠 먹었는데, 먹자마자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식감은 둘째 치고, 맛이 깊다고. 어떻게 이렇게 영양 넘치는 맛이 있을 수 있냐고. '어라?' 하면서 덩달아 나도 한 술 떴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씹을수록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은근하게 퍼졌다.

이게 어릴 적 내가 알던 그 토란이 맞나?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제야 토란의 저주에서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황 서방이 좋아하는' 토란국 특식

이후 토란국은 '우리 황 서방이 좋아하는' 이란 타이틀을 달면서, 가족들 사이 완벽한 특식으로 자리 잡았다.

직접 키운 고추를 건조기에 말리고 빻아 만든 고춧가루, 손수 갈아낸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처럼 쉼 없이 전해주신 외할머니의 작품인 토란국. 그런 명품 토란국을 받아 먹으며 우리는 자주 명절처럼 시간을 보내다가, 작년 말 사정이 있어 결국 대가족을 떠나 서울 바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날을 며칠 앞둔 저녁, 나는 남편과 같이 외할머니 방에 이불을 나눠 덮고 앉아 들깨 토란국 레시피를 받아 적었다. 외할머니는 말해주면서도 작게 미소 짓는다.

"젊은 아-덜이 이걸 우찌 할 수 있을기고? 암턴, 잘들 해 보래이".

감으로만 만들어 내던 음식을, 순서와 말로 정리하려니 쑥스럽다며 외할머니는 연신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레시피 전수받는 중
레시피 전수받는 중 ⓒ 조성하

그 뒤로 바쁜 밥벌이 생활, 또 밀키트와 냉동 식품에 익숙해진 탓에 아직 제대로 시도해보진 못했지만, '들깨 토란국 만들기'는 우리 부부의 중요한 도전 제목으로 남아 있다.

지난 주말 오후엔 엄마가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내왔다. 추석 때 우리가 온다고 전하니 외할머니가 당장 시장에 카트를 끌고 가 토란을 사 오셨다고. 장사하는 분께 굳이 "우리 손자사위가 좋아하는 것이니 좋은 걸로 달라"고 하셨다면서.

'땅속 계란'이라는 토란,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와 깊이를 생각해본다. 어쩌면 오래전 추석날 어른들도 토란국 안에 담긴 외할머니 사랑과 정성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었나 보다. 나의 알아차림은 사실 조금 늦었지만, 이것 또한 깨닫는 데 나름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추석에 뵈어요!
추석에 뵈어요! ⓒ 조성하

이젠 그저 '추석 음식'만이 아니라, '명절에 먹는 우리만의 특별 보양식'이 된 토란국.

토란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출 뿐 아니라 면역력 강화와 혈당 조절, 혈액 순환 등에 도움을 주고, 심혈관 질환 예방에 도움을 주는 등 몸에 좋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미끄덩한 그 느낌이 실은 약재나 다름 없던 것이다). 그러니 혹시 나처럼 식감 탓에 토란을 멀리했다면, 이번 추석에는 한 번 마음먹고 도전해 보시길 바란다. 기억과는 달리 의외로 괜찮을 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에도 우리는 외할머니를 보러 서울로 향할 예정이다. 외할머니가 오래 건강하셔서 할머니표 진짜 토란국을 좀 더 오래,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추석음식#명절음식#토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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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문장들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여백의 시간을 즐기는 30대. 모든 가능성의 처음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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