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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꼭 성묘를 가야 하나요?"

며칠 전 올해 고3인 딸아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순간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몰라 당황했다.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중의적인 질문이어서다. '추석날'에 방점을 찍으면, 왜 온 국민이 한날한시에 조상들의 묘를 찾아가느냐는 것이고, '성묘'에 초점을 맞추면,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데 굳이 묘를 찾아가야 하느냐는 의미일 테다.

한편으론 생략된 '주어'에 주목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수능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마당에 성묘 가는 대신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스며있다. 언젠가 아이는 수험생에겐 추석 명절과 연휴는 학습 리듬을 깨는 장애물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하긴 대한민국 고3에게 추석이 사라진 건 이미 오래다.

기실 딸아이의 심드렁한 질문은 추석 명절에 대한 미래 세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명실상부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의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려면, 앞서 말한 세 가지에 기성세대는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요즘 들어 세대를 불문하고 '추석'보다 '연휴'에 더 의미를 두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추석날 성묘를 가는 농업 사회의 전통을 인공 지능까지 등장한 21세기에 그대로 이어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농촌이 텅 비어가고, 국민 다수의 고향이 대도시의 산부인과 병원인 마당에 '귀성'이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한가요?"
"수험생에게 추석 연휴는 학교가 아닌, 스터디 카페로 등교하는 날이에요. 추석이 민족의 최대 명절이라지만, 그때만큼은 수험생은 같은 민족이 아닌 셈이죠."

딸아이의 이어지는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린 채 오랜만에 답사에 나섰다. 명절 연휴 때 차를 몰고 집 밖에 나가는 건 고행길이 될 터다. 고향도 아닌, 아무런 인연이 없는 농촌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할 각오로, 현재는 전북 군산시로 편입된 임피로 향했다. 이곳 광주에서는 1시간 반 거리다.

딸의 질문을 뒤로 하고 굳이 임피로 가다

 임피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
 임피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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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임피를 택한 이유가 있다.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농업 사회의 전통이 허물어지고 소멸 위기에 직면한 대표적인 농촌 마을이어서다. 게다가 1920년대 일제의 수탈에 맞선 농민 항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임피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가다 보면, 넓게는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고, 좁게는 추석 명절의 미래도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 있다.

본디 임피는 군산을 거느렸던 큰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기 위한 항구로써 군산이 번창하기 전까지는 주변 지역을 통할하던 지방관이 기거한 중심지였다. 일제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와 군산항을 잇는 철길을 건설할 때, 지역의 유림을 중심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할 만큼 항일 의식이 남달랐던 지역이다.

곡창지대였던 만큼 수탈이 유달리 심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대규모 농장이 곳곳에 세워졌고, 총독부와 결탁한 친일 지주들이 활개를 치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인근 군산에는 일제가 세운 수탈 기관으로 사용된 건물이 즐비하고, 일본인 이름을 내건 농장도 곳곳에 남아있다.

명색이 추석 연휴인데 임피로 접어드는 도로는 믿기 힘들 만큼 한산했다. 고향 방문을 환영한다는 도로변 현수막마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인근 농공단지를 오가는 공사 차량의 굉음만이 요란했다. 과거 우리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린 곡창이었지만, 지금 이곳은 논밭을 갈아엎은 자리에 조성한 공장들이 하늘을 가리고 섰다.

고속도로의 귀성 차량은 서울과 지방의 대도시를 연결할 뿐이다. 이미 임피 같은 농촌 마을엔 귀성하는 아들과 딸, 손자, 손녀를 맞을 어르신들이 몇 남아있지 않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언론에서 역귀성이 유행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럴 수 있는 분들조차 거의 없다. 그분들이 살던 집은 흉물처럼 방치되거나 목 좋은 곳이라면 카페 등으로 개조되어 있다.

주민은 없고 마을 이름만 남은 형국이다. 인적이 끊긴 곳에 조상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부러 성묘하는 이들이 있을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묘가 자리한 산으로 오르는 시멘트 길은 입구부터 잡풀만 무성하다. 묘소 주변을 벌초하기 전에 당장 오르는 길부터 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지방자치단체가 발 벗고 나설 일도 아니다.

"지금의 40~50대가 명절에 성묘를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겁니다. 종국에는 매장은커녕 화장해서 유해를 모시는 묘조차도 사라지게 될지 몰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마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던 지인의 말이 실감 났다. 이제 도시마다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도 이미 한계 상황이라며, 성묘라는 단어 자체가 '고어'로 남게 될 거라고 예언했다. 기일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었다가 알림음이 울리면 가족끼리 고인의 삶을 함께 추억하는 정도로 간소화될 게 뻔하다는 거다.

어느덧 추석 명절 연휴는 무더위가 가고 쾌청한 가을날 며칠 동안 가족들끼리 휴가를 즐기는 시간으로 의미가 굳어질 듯하다. 기후 위기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게 될 앞으로는 고통스러운 여름을 견뎌낸 것에 대한 위로 휴가쯤으로 여겨지게 될지도 모른다. 덩달아 귀성과 귀경이라는 단어도 사라지거나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21세기식 성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임피역사 앞 광장에 세워진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임피역사 앞 광장에 세워진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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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가 시작되어 점심을 챙겨 먹기가 힘들 줄 알았는데, 웬걸 모든 가게와 식당이 문을 열었다. 추석 당일 하루만 쉰다고 안내판을 내건 곳이 대부분이지만, 연휴 내내 영업한다는 곳도 있다. 그들 역시 '추석'보다는 '연휴'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뜻이다. 주방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은 귀성하는 자녀와 손자, 손녀가 아닌, 손님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임피에는 일제강점기 농민 항쟁 기념비가 두 곳 있다. 하나는 임피중학교 교정에, 다른 하나는 옛 임피역 광장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일어난 '옥구 농민 항일 항쟁'은 전남 신안의 암태도 소작쟁의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농민 항쟁으로 청사에 빛난다. 특히 일본인 지주에 맞선 지역 농민들과 청년들의 당찬 투쟁이었다.

다행히 그곳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나들이 삼아 찾아온 듯한 가족 단위의 탐방객도 있고,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만났다. 그들의 고향이 이곳 임피인지는 알 길 없으나, 명절 연휴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주변에 아무런 휴게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 외진 사적지를 찾았다는 것 자체가 반갑고도 놀라웠다.

그들은 추석날 성묘 삼아 농민 항쟁 기념비를 찾아온 건 아니었을까. 따지고 보면,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장소로 이만한 데가 없다. 부모와 조부모 등 직계존속만이 조상일 리는 없다. 일제의 수탈에 맞서 목숨 바쳐 저항한 분들이야말로 마땅히 기려야 할 온 국민의 조상 아니겠는가. 사적지 안내판을 찬찬히 읽던 그들의 진지하고 선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철길에서 본 옛 임피역사. 역사 안팎에는 당시 역을 오간 이들의 모형을 세워두었다. 폐역된 후 철길은 아예 잡풀로 뒤덮혔다.
 철길에서 본 옛 임피역사. 역사 안팎에는 당시 역을 오간 이들의 모형을 세워두었다. 폐역된 후 철길은 아예 잡풀로 뒤덮혔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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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딸아이에게 건넬 답을 찾았다. 아무리 농업 사회의 전통일지라도 성묘하는 문화가 사라질 리는 없다. 다만, 그 의미와 장소가 달라질 뿐이다. 추석날 우리 역사를 기억하고 유적을 찾아가는 게 '21세기식 성묘'일 수 있다. 농촌은 텅 비어가지만, 그곳에 남은 역사의 자취는 여전히 또렷하다.

정작, 추석 명절의 의미를 훼손하는 건, 수험생에게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대학 입시다. 그들에게 성묘도, 차례 준비도, 가족 모임도, 친척 인사도 다 필요 없고, 그럴 시간에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모와 교사가 존재하는 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은 흰소리일 뿐이다.

#전북군산시임피면#옥구농민항일항쟁#성묘문화#농촌소멸#추석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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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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