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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이의 추석이야기
 솔이의 추석이야기
ⓒ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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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열면 명절 두 밤 전의 설렘과 비장함이 느껴지는 우리네 동네 풍경이 펼쳐진다. 시간적 배경은 1990년대 초반쯤이려나. 어른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린이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모습들이 그림으로 나타난다.

전봇대 옆에서 중절모를 쓰고 쪼그려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노인, 약국에서 꿀꺽 약을 삼키는 사람, 수증기가 펄펄 나는 쇠 다리미로 옷을 다리는 머리 벗겨진 세탁소 아저씨, 동네 슈퍼 앞 추석 선물 세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가게 주인, 추석 선물인 듯한 종이가방과 상자를 두 손 가득 들고 걸어가는 양복 입은 남자, 목욕하는 남자들과 머리하는 여자들.

이 그림책에는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 동시에 그 시절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갈 준비로 바쁜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감있게 묘사된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소환되는 마법이 펼쳐지는 이유다. 아, 이건 어른들에 한정해 유효한 효과일 테다.

차를 타고 고향으로 이동하는 장면도 한 번 살펴보자. 그 시절 명절엔 차가 어찌나 밀리는지,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거나, 거울로 치아에 뭔가가 끼진 않았는지 살펴보기도 하는 등 모두가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딴청을 피우고 있다. 차 안의 한 남자는 창밖으로 몸을 불쑥 내밀고 차가 왜 움직이지 않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차 뒤에 있던 아이는 지겨워 아예 발라당 누워버렸는지 뒷좌석 창문 너머로 아이의 발만 빼꼼히 보인다. 급기야는 차에 있던 사람들이 못 참겠는지 차를 도로에 세워둔 채 길 밖에 나와 라면을 끓여먹거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까지 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시골 마을의 풍경은 여유롭다. 남자들이 차례상에 절을 하는 가운데, 여자 중에는 아이인 솔이 혼자 남자들 틈에 끼어 절을 하는 모습도 1960년생인 남성 작가가 포착해 낸 지점이라 생각하면 예사롭지 않다.

추석은 끝났고, 솔이네 가족은 한밤중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명절날 나설 때와 달리 엄마 아빠의 등은 굽었고, 표정은 지쳐 있다. 솔이도 아빠 등에서 곤히 잠들었다. 집에 돌아온 뒤 옷을 정리하고, 할머니께 도착을 알리는 전화를 거는 솔이 아빠의 모습은 그 시절 딱 우리네 모습이다. 솔이와 솔이 동생은 이미 엄마‧아빠가 펴 주신 이불에 누워 꿈나라로 갔다.

이 책은 당초 글 없는 그림책으로 기획됐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이 한 장의 그림만으로도 힘이 있는 그림책이길 바랐다고 한다. 1995년 초판 출판 당시의 분위기상 그림당 한두 줄의 글이 들어가긴 했지만, 실제 이 책은 그림만으로도 차고 넘치도록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묘한 책이다. 또 초판이 출판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보면, 이 책이 그 시절 서민들의 추석 풍경을 재미있는 그림으로 기록한 문서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으면 더욱 풍성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책을 보면서 어른들의 말이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 본다. "우리 땐 저랬지"라고 하면서 말이다. 어린이들은 "그땐 정말 저랬어요?"라며 못 미더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이 책은 추석 즈음, 어린이와 어른들 사이에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 내기엔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1인 언론 '소리의숲' (forv.co.kr)에도 실립니다.


#그림책#이억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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