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곳곳에 숨겨진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발로 직접 걸으며 발견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문화유산 애호가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가감없이 전해드립니다.[기자말] |
- ②편 '
신륵사 다층석탑만의 고유한 무늬'에서 이어집니다.
§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대전근현대사전시관)
§ 분류 : 국가등록문화유산 (2002년 지정)
§ 주소 : 대전 중구 선화동 287-2
§ 탐방일 : 24. 6. 19.
광혜원을 떠난 아침,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스파크의 핸들을 잡고 광주로 향했다. 이번 문화유산 탐방은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나보기로 했지만, 숙소만큼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외할머니가 계신 광주를 목적지로 삼았다.
광혜원에서 광주까지는 약 3시간 거리. 아직 이른 시간이라 도착하면 점심 즈음일 것 같았다. 그런데 3시간 내리 운전만 하자니 지루할 것도 같고, 중간에 들를 만한 도시들도 많아 바로 광주로 넘어가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지도 앱을 켜고 경로를 살펴본다. 광혜원에서 광주로 가는 길목에 대전이 있다. 대전이라... 출장으로 잠시 스쳐 간 기억만 남아 있다. 이번 기회에 그곳의 문화유산을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
검색을 하던 중, 옛 충남도청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기회였다! 사찰이나 궁궐 같은 옛 목조 건축에 익숙한 나로서는 근대 문화유산을 접할 좋은 기회였다. 고민 없이 대전에 들르기로 한다.
일제가 지은 관공서
1시간 남짓 달렸을까, 어느새 대전 도심에 진입해 있었다. 왕복 8차선 도로에 들어서니 차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네 개의 대로가 만나는 교차로 옆 커다란 황색 건물이 눈에 띄었다. 대전에 남아 있는 근대 관청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바로 '옛 충남도청'이었다.
구 도청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1932년 일제에 의해 지어졌다. 원래 충청남도의 도청(당시는 감영)은 공주사대부고 자리였는데(조선 시대 문루를 재현해 두었다), 1932년 대전으로 충남도청이 이전하며 이곳에 새로 지어졌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도청으로 사용되었고, 전쟁 중에는 임시 정부 청사와 육군 본부로 기능했다. 이후 2012년까지 80여 년간 도청으로서 역할을 이어오다, 충남 홍성에 새 도청이 지어지며 역사 속 한 장으로 남게 되었다.
노란 벽돌에 담긴 역사
차에서 내리자 따가운 햇볕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며 눈앞에는 서 있는 노란색 벽돌 건물을 살펴본다. 건물 좌우를 오가며 외관을 살펴본다. 1층 정면에는 차 한 대 들어갈 넓이의 포치가, 좌우에는 수직성을 강조한 창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도청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했지만, 건물 자체는 여전히 실사용 중인 듯했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도 중요한 회의가 있었던지, 포치 아래에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길 건너 중구청에서도 공무원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활발히 실생활 속에서 활용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총 3층이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ㅌ'자(혹은 'ㄷ'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관공서의 구조다. 일제가 지은 옛 인천부 청사(현 인천 중구청 제1청사, 1933년 준공), 옛 경상남도청(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1925년 준공)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옛 충남도청은 1932년 처음 2층 건물로 세워졌고, 1960년대에 3층이 증축되었다.
노란색 벽돌로 이루어진 외관은 과한 장식 없이 단정하고 절제된 인상을 준다. 특히 외벽의 벽돌은 매끄럽지 않고, 마치 빗살무늬토기를 연상시키듯, 선들이 하나하나 긁혀 나가며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930년대의 미감이 배어 있었지만, 벽돌을 하나하나 긁었을 인부들의 노고를 상상하니, 감탄보다는 묵직한 탄식이 나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치 양쪽 창문 위로 새겨진 독특한 문양이었다. 서울대 디자인학부 김민수 교수는 이를 '제국의 문장'으로 결론 내렸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태양륜, 국화륜, 안목각이라는 세 가지 문양을 조합한 디자인으로, 덴노(天皇)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장식 문양일 뿐이라는 반대 주장도 있지만, 건물을 직접 탐방한 나로서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남긴 흔적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김민수 2009).
포치 밑으로
주차장을 지나 포치 아래로 들어섰다. 등산 모자에 팔토시를 낀 탐방 차림으로 단정하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려니 괜히 뻘쭘했다. 포치 양쪽에는 삼각주처럼 끝이 넓어지는 경사로가 펼쳐져 있었다. 차량이 건물 입구까지 진입할 수 있도록 고려한 설계였다.
진입로 끝에는 둥그렇고 커다란 장식이 있었다. 돌로 만든 반원 모양의 구조물로, 문장의 끝을 알리는 마침표(.)처럼 경사로의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비슷한 장식을 1956년 완공된 경희대 본관 건물에서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1900년대에 유행했던 건축 양식의 흔적일 것이다.
개관 당시, 포치 천장에는 중앙창(skylight)이 있었다고 한다. 햇빛을 실내로 부드럽게 끌어오던 이 창은 포치 아래를 밝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밋밋한 천장과 전등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후 개축 과정에서 포치 윗면이 발코니로 변경되는데 그때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현장 안내문).
포치는 사람들이 빠지면 더 자세히 둘러보기로 하고, 실내로 들어선다. 포치와 중앙 로비가 바로 이어져 있지는 않았고, 둘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는 현관홀이 하나 있었다. 방 하나 정도의 크기였고, 왼쪽은 대전근현대사전시관, 오른쪽은 경비실이었다.
대전의 근현대사를 대략적으로라도 알면 구 도청 건물 탐방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주저 없이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안내대 직원은 자기 할 일을 할 뿐 딱히 날 신경쓰지 않았다. 두어 발자국 다가가 묻는다. "저기 혹시 해설도 따로 해주시나요?"
직원이 고개를 들며 답했다. "아니요. 해설은 따로 없어요. 단체 관람객이 요청하면 자원봉사자 선생님이 해주시긴 하는데..." 말끝을 흐린다.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충분한 답변이었다.
멋쩍게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냥 볼게요." 본관을 빨리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는지, 전시관을 15분 만에 빠르게 돌아봤다. 규모는 작고 소박했지만, 천천히 살폈다면 30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사람 무리를 피해
전시관은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었다. 출구로 나오니 오른편에 길게 뻗은 복도 너머로 중앙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행사 시간이 다가온 건지, 포치에 있던 사람들이 로비까지 흘러들어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지금 굳이 북적이는 곳을 헤집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늘 그렇듯, 소리가 모이는 곳보다는 흩어지는 공간이 더 좋다. 마침 눈앞에 건물 뒤편으로 이어지는 작은 문이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 뒤편을 둘러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④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채널(브런치 등)에도 실립니다.참고 문헌
박상원. (2014). 건축으로 역사를 만나다. 전기저널,, 80-83.
김민수. (2009). (구)충남도청사 본관 문양 도안의 상징성 연구. 건축역사연구 :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 18(5), 41-58.
이상희. (2013). 대전 원도심 재생을 위한 도시역사성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목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