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
'삐걱.' 원일교통 노조위원장 김종우(1955년생)가 청주도시산업선교회(아래 청주산선) 철제문을 열었다. 금속 마찰음이 마치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불과 1년 만에 청주산선 문턱을 다시 넘을 줄은 몰랐다.
아기 분윳값이나 벌려고 1984년에 시작한 택시 운전이 이렇게 꼬일 줄은 미처 몰랐다. 전국이 들썩이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뭣도 모르고 시작한 파업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청주산선 정진동 목사를 만나 SOS를 요청한 것이다. 다행히 회사 측과 원만한 합의를 이뤘다.
그런데 그때 타결된 내용이 1년 만에 뒤집어졌다. 허탈한 마음과 더불어 아이 학원비가 걱정됐다.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조합원 전체 생계가 걸린 문제였다.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자라목이 됐다.
"88년도 청주법인택시 임금협상 타결"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아내의 눈이 똥그래졌다. "뭔 소리래유?" "개XX들이 완전월급제를 파기했구만."
낮은 문턱
"목사님" 하며 입을 연 김종우는 밀실 협상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청주시 법인택시의 공동 임금 교섭은 애초에 순조로웠다. 당시 원일교통 노조위원장이던 김종우도 협상 테이블에 참석했다. 그런데 협상이 마무리되던 즈음에 노조 측 대표자가 김종우에게 엉뚱한 주문을 했다. "바로 끝날 거니까 나오지 마라"고 한 것이다.
교섭위원회 간사인 자기가 문화동에 있던 노동위원회 사무실의 협상테이블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 이상했으나 '별일 있으려구' 하는 생각에 노조 측 대표자의 말을 따랐다. 집에 와 무심코 튼 라디오에서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나왔다. 완전월급제를 파기하고 일당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1988년 6월 2일이었다.
벽돌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바지를 추스려 입고 회사로 향했다. 노동조합 사무실에는 조합원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목청을 키우고 있었다. 김종우는 사무칠 칠판에 87년도 기존 협상안과 88년도 협상안을 메모하며 조목조목 설명했다.
"완전월급제를 똥통에 팽개쳐 버렸구만!" "아파서 병원에 가도 월급에서 깐다네." "근속수당도 없어졌어."
개정이 아니라 개악이었다. "88 임금협상 무효다" "임금협상 재개하라"며 원일교통 전체 조합원이 회사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사장과 관리자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답답한 이가 우물 판다고 조합원들은 택시 충북도지부 사무실과 노동위원회 사무실을 찾아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 사람 얼굴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 김종우를 포함한 조합원들이 근무지 이탈로 모두 해고 당했다. 회사 문을 잡아당겼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택시 충북도지부, 노동부 청주지방사무소, 택시 근무 교대지 등에 가서 공무원과 다른 회사 택시 기사들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속시원한 답변은 아예 없었다.
그는 영진택시 조병완 등을 포함해, 다른 택시 회사 노조위원장들과 함께 6월 4일부터 7일까지 총파업을 감행했다. 파업에는 택시 노동자 1500명이 참여했고, 하루 100~20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렇게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김종우가 찾은 곳이 청주산선이었다. 김종우가 울끈거리며, 때로는 비장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내내 정진동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정진동은 "종우씨가 마음 고생이 많았겠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말 한 마디에 김종우는 10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듯했다. 김종우가 다녀간 후에 영진교통, 신안교통 등의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청주산선의 문턱을 밟았다.
그러다가 청주시 법인택시 17개 노조위원장들이 한꺼번에 정진동을 찾았다. "목사님. 청주산선을 농성장으로 이용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세요." 정진동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교회는 양떼들의 안식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100여 명의 택시 노동자가 청주산선을 농성장으로 쓰기로 한 날은 1988년 6월 8일이었다.
난닝구 차림으로
앞에 선 가녀린 여성은 마음이 콩닥였다.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를 했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 선 것은 처음이다.
관객들은 그냥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새까만 얼굴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아저씨들이었다. 더군다나 보통 연주장이나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은 관객들의 옷차림이었다. 난닝구(러닝셔츠)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청주산선에 모인 200여 명의 택시 노동자들은 고작 선풍기 몇 대에 의존해 한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돗자리에 앉은 이들은 가만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러니 노래를 배우고, 교육을 받고, 실내 집회를 하는 내내 상의는 속옷 차림일 수밖에 없었다.
"가수 정수라 아세요?" "그럼요."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을 개사한 노래를 배우겠습니다."
대중가요를 개사한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한 소절씩 배우던 노동자들은 곡이 완성되자 가사 내용이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 볼게요!"
방세는 하늘 위로 치솟고 임금은 바닥에서 벌벌벌 /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우리와는 거리가 먼 곳 / 잔업에 곱배기에 특근에 데이트 나들이도 못하고 / 우리의 조그마한 꿈조차 산산이 부서지는 곳 /원하는 것은 돈이 없어 살 수가 없고 / 뜻하는 것은 시간이 없이 할 수가 없네(하략)
"다음은 도성이 부른 <사랑의 배신자>를 불러 보겠습니다" 물론 개사한 노래다.
"돈먹고 떠난 놈아 5천 가족 희롱한 놈아 / 노동3권 어디 갔나. 쓸개도 없는 놈아 / 인간의 기생충아 기사 생명 오천만원에 맞바꿨냐 / 제주도 호텔가서 계집끼고 자느냐 나쁜 놈들 기생충 / 영원한 우리의 쓸개"
기만적인 임금협상에 도장을 찍은 노동조합 대표자들을 비아냥거리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에 농성노동자들은 박수를 치며 배꼽을 잡았다. 이내 그들은 서글픈 자신들의 현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저 학상(학생)은 누군디, 노래를 저렇게 잘 한댜?" "학상이 아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민중의 당에서 나왔댜" 민중의 당에서 파견된 노래 강사는 충북대학교 학생 박은경이었다.
링거 꼽고 농성장에 와
밀실야합에 따른 총파업 선언이 지난 지 35일이 되고 청주산선에서 농성한 지 29일이 되는 날이었다. 따르릉 소리에 정진동은 수화기를 들었다. "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소!" 웬만해선 흥분하지 않는 정진동이 큰소리를 쳤다. 옆에 있던 노동조합 간부들의 간이 졸아들었다. 안 좋은 소식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목사님 뭔 일입니까?" "아 글쎄, 국회의원들이 내려 오지 않는다고 임금협상을 미룬다네요." 택시 문제의 주무관청인 청주시가 한 달여나 진행된 총파업에 '나 몰라라'하다가 뒤늦게 협상을 중재한다며 나선 일이었다. 결과는 쇼에 불과했다.
평화민주당(총재 김대중)에서 청주 88택시 총파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청주 택시파업은 전국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러는 와중에 국회 노동분과 이해찬, 이철용 의원이 7월 8일 청주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에 청주시장은 오후 5시 시장실에서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의 협상테이블을 준비했다. 양쪽 대표자와 청주산선 정진동 목사, 청주경찰서장, 충북지방노동위원장이 참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일정상 못 내려오게 되자 청주시장이 하루 전에 일방적으로 협상을 파기한 것이다.
"임금협상이 노동자들을 위해 하는 거지, 국회의원들을 위해 합니까?"라는 정진동의 항변에 청주시 공무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시청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기로 했다.
긴급히 현수막 제작에 들어갔다.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현수막을 앞세운 노동자들은 다음날인 7월 8일 청주시청 정문을 향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청주시청 정문은 공무원들이 철통같이 막아섰다. 공무원 뒤에서는 전경들이 양쪽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택시노동자들이 정문에 진입하려 하자 공무원들의 욕설과 폭행이 이뤄졌다. 택시노동자의 한 부인이 공무원에게 뺨을 맞았고 욕설을 당했다. 이에 항의하던 문화택시 한봉룡씨가 공무원이 내리친 각목에 머리가 터졌다. 청주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치료를 받고 며칠 후 링거를 꼽고 농성장인 청주산선으로 갔다. 당시 상황은 현장을 누비며 취재한 민중의 당 이경옥이 워드피아로 제작한 <투쟁속보>에 상세히 기록됐다.
내동댕이쳐진 짜장면
"누가 여기서 짜장면을 먹으라고 했어!" 잔뜩 화가 난 공무원은 짜장면 그릇을 내던졌다. 면과 춘장이 사방으로 튀었다. "저 X이 음식을 던지네"라며 아우성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공무원은 몸을 돌렸다.
청주산선에서의 농성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택시노동자 부인들은 6월 21일부터 청주시청 위민실 앞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스티로폼 바닥에서 갓난아이 귀저기를 갈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분유를 먹이는 사이 농성은 18일째 이어졌다.
위민실 앞이기에 번듯한 사무실에서 농성한 것이 아니라 시장실과 위민실 사이의 복도에서 농성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 18일 동안 돗자리 위에서 침식을 하며 농성을 하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위민실 앞에서는 짜장면만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니었다. 여성의 인권이, 인간의 존엄성이 내동댕이쳐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화택시 한봉룡의 머리가 깨진 날, 국회의원들이 내려 오지 않는다고 청주시가 임금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날인 7월 8일 밤이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청주시청 내의 모든 전깃불이 꺼졌다. 동시에 공무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위민실 앞으로 모여들었다. 농성자 해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면 옷을 벗을 거요!"
위민실 여성 농성자들이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긴 채 겉옷을 모두 벗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준비한 담요로 여성들의 몸을 감싼 후 시청사 1층으로 옮겼다. 이 와중에 저항하는 여성들에게는 담요 위로 주먹을 휘둘렀고, 심지어 계단에서 굴렸다.
상상할 수 없는 이 진압 과정에서 원일교통 이아무개의 부인이 유산하게 됐다. 공무원들은 마치 전쟁터의 군인처럼 무지막지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있던 여성을 마대로 씌워 끌어내기도 했다. 그 여성은 수치심으로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총파업 36일째, 위민실 농성 18일째 벌어진 목불인견의 상황이었다. 경찰과 시청 고위직이 모두 지켜보는 와중에 벌어진 청주시 공무원들의 만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