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부산, 제주, 미국, 경기 가평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다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
체험학습으로 들뜬 아들에게 정성스레 싼 도시락을 내밀었다. 혹여나 도시락이 가방 안에서 망가질까 봐 버스에 앉아갈 때 조심하라 일렀다.
"괜찮아. 나 버스에 혼자 앉아 가서 가방은 옆자리에 놔두면 돼!"
아들의 대답에 나는 심란해졌다. 너는 왜 친구와 함께 앉아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스물다섯 명이라 한 사람은 혼자 앉아 가야 하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혼자 앉아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아들을 포함 몇 명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나름대로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결과라고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들은 아싸 아닌 '그럴싸'
6학년이 되고 반에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아이의 말에 마음 한구석이 콕콕 쑤셨다. 친구 관계가 넓지 않은 아들은 스스럼없이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다. 이미 형성된 무리에 끼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듯했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해마다 돌아오는 새 학기가 늘 달갑지 않았다. 친한 친구와 떨어지기라도 한 날엔 허허벌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것 같았다. 학년마다 겪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점점 덜해졌다. 대학에 가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기술(?)이 늘어 자연스럽게 무리에 스며들었다. 그 과정을 겪은 탓인지 아이가 느낄 외로움과 불편함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1학기 수업 참관 때만 해도 그렇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아들을 놀래줄 심산으로 복도에서 창문으로 교실 안을 들여다봤다. 두리번두리번 아들이 어디에 있나 찾았다.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깔깔거리는 아이들 틈 사이에서 덩그러니 혼자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색한 표정을 한 채 겉도는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란. 가슴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재잘재잘 친구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딸아이에 비해 친구 이야기를 남달리 하지 않는 아들은 어쩌면 '혼자'가 더 편하거나,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또래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흔히 말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 일수도 있다.
심란한 마음에 머릿속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잡념으로 가득 찼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활달하던 아들이었다. 그해 겨울,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2학년 내내 가정학습을 하고 학교에 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2년 가까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아이 사회성을 망친 범인은 바로 몹쓸 전염병이었다고 코로나19에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다.
아니면 또 다른 용의자는 나였을까? 아이 또래의 엄마들과 어울려 무리를 만들어줘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친구나 선후배, 직장동료가 아닌 아이가 연결고리가 되는 관계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만남 후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는 경험이 반복되니 자연스럽게 만남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사회성이 부족한 엄마일지도.
많은 부모가 아이의 사회성이 부족하고, 친구가 없는 것이 엄마의 잘못이라고 자책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는 말은 사회성뿐만 아니라 아이의 행동이나 가치관, 인격 형성에 부모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행여 아이가 부족하거나, 사회에서 인정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부모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코로나도 나도 범인이 아니다. 아이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아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그나마 몇 없는 친구들과도 모두 다른 반이 되고, 반에 친한 친구가 없어 조금 힘들다고 했다. 이미 형성된 친구들 무리엔 끼어들기가 힘들다고. 천천히 다가가는 중이라고.
그렇다고 학교 생활이 외롭고 힘든 건 아니라고 했다. 지적 호기심이 강한 아들은 다행히 학교 수업을 통해 욕구를 충족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너무 힘들면 선생님과 내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내 불안을 눈치챈 것일까? 아이는 말했다.
"엄마, 나 아싸 아니야! 그럴싸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싸? 그럴싸는 시쳇말로 인싸(insider)도 아싸(outsider)도 아닌 그 중간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심각한 상황에서 그럴싸한 단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무리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누구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건넛집 엄친아를 곁눈질하며 우리 아이도 인싸이길 바라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나도 학창 시절에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아이는 그러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자 모순이다.
아이는 나의 우려와는 달리 옆 반의 친한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신나게 체험학습을 마쳤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수다를 떠는 대신 넓은 좌석에 여유롭게 앉아 창밖의 풍경을 응시했을 것이다.
베어버리지 않은 벚꽃나무처럼
처음 집을 짓고 마당에 심었던 벚나무는 몇 년간 꽃이 피지 않았다. 벚꽃이 피지 않는 벚나무라니. 어린 나무일 때 뿌리를 내리느라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병충해로 나무에서 이상한 진이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농약사에 물어보니 다른 식물에 전염될 수 있으니 베어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비록 상태가 시원찮아도 살아있는 것이 분명한데 강제로 베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잔가지들을 짧게 치고 약을 사와 몇 차례에 걸쳐 뿌렸다.
나무는 이듬해에도 꽃이 피지 않고 잎만 무성했다. 평소처럼 물을 주었고 벚나무가 내어주는 그늘을 즐겼다.
묵묵히 지켜봐 준 우리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나무는 재작년 처음으로 벚꽃을 보여주었다. 거리의 화려한 벚꽃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듬성듬성 힘겹게 피운 꽃이 귀하고 고마웠다.
마침내 올봄 멋지고 풍성한 꽃을 피웠다. 팝콘 같은 꽃송이들은 황홀했다. 나무 주위로 연일 꽃가루를 잔뜩 묻힌 호박벌들이 붕붕 소리를 냈다.
고비를 넘겨 화려한 꽃을 피운 나무에는 땅속에 뿌리를 내리던 시절, 혹독한 병충해에 생사를 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봄날을 떠올리며 나는 내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지금 교실이라는 작은 무대 위에서 주목받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그런 단역을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다 어느 순간 주인공으로 올라설 수도 있고, 계속 단역으로 남을 수도 있다. 물론 주인공과 단역 중 누가 더 행복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단역이어도, 그럴싸여도 상관없으니 행복한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친구를 좀 사귀어보라 다그치지 않을 것이다.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이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믿어주리라 다짐한다.
저마다의 기질이 존중되고 발휘되는 세상에서 아이는 자신만의 달란트로 미래 사회에 귀하게 쓰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 본인의 이야기를 쓰도록 허락해준 아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