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9월 26일 최홍준(崔弘俊) 독립지사가 타계했다. 경상북도 영일군 의창면(현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 179번지가 본적인 지사는 1920년 8월 17일 출생했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재학 중이던 1940년 3월 휴학 후 유학차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나이 20세였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민족차별은 우리땅에 있을 때와 또 차원이 달랐다. 분개한 그는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봉창 의사도 이런 사례의 상징적 경우이다.
'이봉창은 호적등본과 신원증명서를 내면 번번이 취직이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1928년 11월 10일 일본 천왕 히로히토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아무 죄도 없이) 유치장에 갇힌 지 11일 만에 석방되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아 검속된 것에 이봉창은 큰 울분을 느꼈고 (중략) 이 사건을 계기로 심경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김도형 저 <이봉창>)
그해 12월, 경북중학 동기 성장환(1916년 경북 상주 출생)을 동경에서 만나 한국인으로서 차별받은 경험을 말하며 울분을 토하였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경멸하고 하숙을 거절하며 차별 대우를 하고 있음은 불쾌한 일이다. 또 우리 조선인이 아무리 공부하여 학교를 졸업하여도 취직은 어려운 일이며, 채용한 후에도 일본인과 차별 대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참혹한 일이다. 이러한 제도가 존속하는 한 조선인은 언제까지고 그러한 학대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조선 민중의 중견 지도자로 되어, 조선 민족의 문화 향상과 실력 양성에 노력하여 일본인과 동등의 수준에 이끈 뒤,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노력하여야 한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성장환'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했다. 실천방안으로 우선 민족문화를 향상시키는 일과 실력양성에 힘을 쏟기로 하고, 비밀결사 효민회(曉民會)를 조직해 단원들을 확충하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효민회 조직해 민족문화 향상과 계몽운동 힘써
1941년 4월 최홍준은 보성전문 동창 여대현(1918년 수원 출생)과 만나 일본에서 겪은 민족차별의 실상을 설명하고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밤새워 토론해 동지가 되었다.
"독일군이 일단 점령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도 슬라브 민족의 끈기와 동장군(冬將軍)의 추위 때문에 소련군에게 탈환되었다고 하는 바,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패전하면 당연히 동아(東亞)의 전국(戰局)에도 영향을 끼쳐 일본군도 단독으로는 전쟁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일본은 패전에 이를 것이며, 그 결과는 반추축(反樞軸) 측이 추축국을 처리하게 되며 (중략) 그때에는 조선도 독립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 민족의 문화향상과 경제력의 충실에 노력해야 한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최은석' 조)"
그들은 1943년 2월 서울 성북동 여대현의 집에서 최홍준과 동향인 포항청년 최은석(1918년생, 경북 영일 흥해)을 새 동지로 받아들였고, "조국독립의 실현을 위해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고, 먼저 민족문화 및 경제력의 향상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여대현' 조)"하였다.
그러나 회원 확충 사업과 계몽 운동 과정에서 활동 전모가 드러나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모두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1945년 8·15광복을 맞아 만기출소 이전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최홍준 지사 공훈록을 읽으며 떠오르는 두 추억
최홍준 지사에 관한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읽으며 두 가지 추억에 사로잡힌다. 첫째는 압록강 아래 '용천'과 관련된 것이다. 용천군 양광면 구룡리 출신 김득하(金得夏) 지사는 최홍준 지사와 연도는 다르지만 날짜는 같은 9월 26일 세상을 떠났다(최 지사는 1995년, 김 지사는 1966년).
2004년 4월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150여 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전국적으로 돕기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절이다. 필자도 대구학생문화센터에서 '금강산 사진전'을 열어 수익금을 성금으로 내었다.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생전에 통일이 되면 김득하 지사 유적지에 꼭 한 번 가보리라.
둘째는, <경북일보>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다시 확인해보니 2019년 12월 26일이다. 기사 첫 문장이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자 포항 출신인 그의 부인 최혜경 여사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다.
"최 여사는 고향이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최홍준 선생의 딸이다. 영일군 의창면(지금의 포항 흥해읍) 중성리에서 태어난 최홍준 선생은 1940년 일본 도쿄에서 조선 항일결사단체인 효민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귀국해 식민통치 부당성을 비판했다. 민중 계몽활동을 하고 일본 패망을 예견하며 독립투쟁을 하다 체포,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으로 출소했다. (중략)
광복 후 경제계에서 활동한 최홍준 선생은 쌍용양회 부회장을 지내고 1995년 별세했다. 정 후보자 역시 고려대 졸업 후 1978년 쌍용그룹 공채로 입사해 17년간 근무하며 상무이사를 지냈다. (중략) 최 여사는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 중에 정세균 후보와 미팅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홍준 선생은 정세균 후보자의 인물됨을 눈여겨보고 대성할 것이라며 사윗감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지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는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