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20년 9월 27일 김동만(金東滿) 독립지사가 40세 한창 나이에 순국했다. 13년 전인 1907년 형 김동삼(민족유일당촉진회 위원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지사와 함께 고향 안동에 협동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했던 김동만 지사는 1911년 가족과 함께 서간도 류허현 싼위안푸(三源浦)로 망명했다.

류허현 일원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이회영·이상룡·이동녕·양기탁 등 신민회(新民會) 회원들이 국외 독립운동 기지로 예정해둔 곳이었다. 하지만 서리와 대흉년 때문에 망명 지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김 지사는 그냥 남아 한인2세 민족교육(삼광학교)과,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단(軍團, 서로군정서) 지원 활동에 진력했다.

일본의 소위 "간도 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

그러던 중 1920년 9월 중무장의 일본군 800여 명이 이른바 '간도 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 계획'에 따라 류허현에 침입했다. 일제 주구 최정규(崔正奎)가 이끄는 일본군에 온양학교 설립자 김세탁 지사가 9월 20일 순국하고, 이어 한족회에서 활동해온 방기전 지사와 윤준태 지사 등 많은 한인들이 피살되었다.

 김동만(왼쪽), 윤준태 지사 순국을 보도한 당시 신문
 김동만(왼쪽), 윤준태 지사 순국을 보도한 당시 신문
ⓒ 국가보훈부

관련사진보기


이때 김동만 지사도 순국했다. 김 지사가 타계한 당시 사건을 독립운동사에서는 '경신 참변'이라 한다. '참변'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경신참변은 일본제국주의가 경신(1920)년에 일으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가리킨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경신참변 희생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3,469명이었다. 그렇다면 3, 4개월 동안 계속된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당한 한국인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일원은 우리나라 독립군이 활발하게 항일전쟁을 펼친 무대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면 일본군대와 식민통치기구를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지리적으로 독립군이 근거지로 삼기에 적합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최신 무기 구입에도 편리했다.

자작극으로 자국민들을 죽이고 한국독립군에 덮어 씌운 일본

1920년 10월 2일 일본에 매수된 중국 마적단이 훈춘(琿春) 일본영사관을 습격, 시부야(渋谷) 경부의 가족 등 일본인 부녀자 9명을 살해했다('훈춘 사건'). 일본은 이를 한국 독립군의 살해 행위로 덮어씌우면서 2만 이상의 대군을 만주에 투입했다. 하지만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청산리 전투에서 12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일본은 악전고투를 면하지 못했다(독립군은 100여 명 전사).

청산리가 말해주듯, 일본군의 만주 진출을 예견한 독립군은 민간인 피해를 염려해 이미 깊은 산중으로 주둔지를 옮긴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패전에 대한 악랄하고도 비인간적인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한 뒤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본군은 "연길현 와룡동에서 교사를 붙잡아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내어 누구인지 식별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또,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렸으며 어린 소녀를 폭행한 뒤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40세 김동만 지사도 이 천인공노할 경신참변 와중인 1920년 9월 27일 순국했던 것이다.

7년 지난 1927년 9월 27일 박재식 지사 타계

그로부터 정확하게 7년 뒤(1927년 9월 27일) 박재식(朴載植)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안동의 독립지사로,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본적: 경북 안동 임동 중평, 생년월일: 1888-05-17)로 기재되어 있다. 타계 당시 39세였다.

박 지사는 1919년 3월 21일 안동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 독립만세운동의 계획과 진행을 주도했다. 박 지사를 비롯해 박진선·배태근·유곡란·유교희·유동수·유연성·이강욱·홍영성 등 동지들은 3월 15일 편항시장 공동 타작장에 모여 거사일을 3월 21일로 정하고, 만일 일본 경찰이 제지하면 편항 주재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그후 각각 자신의 거주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동참자를 조직했다. 박 지사는 유곡란·박진성과 함께 편항 주변 주민들을 모으는 일을 맡았다.

동네별로 참가자 조직하고 당일 시위 이끌어

이윽고 3월 21일 오후 2시쯤, 500여 명의 독립만세시위 군중이 편항시장에 모였다. 박 지사는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어내었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해 배태근의 뺨을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리다가 군중이 강력히 항의하자 유연성 지사를 붙잡아 주재소로 달아났다.

안동군 월곡면(현 예안면) 계곡동 거주 유연성은 박 지사에게 처음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제안한 인물이었다. 박재식은 "지금 만세운동을 펼치고 관청을 파괴하여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면 반드시 독립할 수 있을 것(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이라는 유연성의 말에 힘을 얻어 흔쾌히 거사 주도를 수락했었다.

게다가 유연성은 3월 21일 당일 만세시위 시작을 앞두고 편향장터 한복판에서 강렬한 연설을 펼쳐 군중의 의기를 북돋웠었다. 그는, 우리가 지금 독립만세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군중들에게 설명한 뒤 가장 먼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의 선창에 기타 주동자들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주재소를 공격해 건물 부수고 무기류 빼앗아

순사가 나타나 시위를 방해하고 유연성을 끌고가기도 했으므로, 동지들은 당초 계획대로 군중을 이끌고 편항 주재소로 달려갔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위협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500여 군중은 오히려 자극을 받아 박재식 등의 지휘에 따라 투석과 곤봉으로 주재소와 순사 숙사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고, 순사들로부터 총기류와 대검 등을 빼앗아 주재소 우물에 집어넣어 버렸다.

군중은 여세를 몰아 임동면 면사무소까지 행진해 또 다시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비품을 파기했다. 자정 무렵 군중은 1500명을 헤아렸고, 시위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여느 지역에 견줘 훨씬 격렬한 만세 시위의 대가는 대구지방법원이 박재식 지사에게 소위 소요·건조물 파괴·가택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요란한 혐의를 씌워 징역 6년형을 언도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박 지사는 6년 동안이나 고문과 형옥 생활에 시달린 끝에 1925년 만기출소했다. 그러나 풀려난 지 불과 2년 만인 1927년 9월 27일 "고문과 수감 생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사망(국가보훈부 공훈록)"했다. 아직 39세 젊은 나이였지만 악랄하고 오랜 고문의 고통은 결국 지사를 순국의 먼 길로 안내했던 것이다. 게다가 공훈록은 박 지사를 소개하면서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참으로 가슴이 먹먹한 일이다.

 유연성, 박재식 지사 판결문 일부
 유연성, 박재식 지사 판결문 일부
ⓒ 국가보훈부

관련사진보기


다시 7년 지난 1934년 9월 27일 문소원 지사 타계

다시 정확하게 7년 지난 1934년 9월 27일 문소원(文小源)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896년 6월 19일 "경상북도 안동 임하 송천 109(본적지)"에서 출생했으니 아직 38세 한창 젊은 나이였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의 문소원 지사 공적소개문을 읽어본다.

1919년 3월 경북 안동의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계의 연합으로 시작되었다. 기독교계의 김익현·황인규·김병우·김계한·김재성·이인홍 등은 비밀 모임을 갖고 3월 18일 안동읍 장날을 시위일로 정하였다. 천도교 계열에서는 문소원이 송기식·송홍식·유동붕·송장식·권중호·이종록 등과 함께 기독교계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8일 오후 6시경 1백여 명이 안동군 읍내에서 모여 3.1운동을 일으켰다. 이튿날인 19일 오전 1시경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이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몰려가서 애국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해산되었다. 다음 장날인 23일에는 더욱 격렬한 제2차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만세시위에 참여한 문소원은 일본 군경의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체포되었다.

7년마다 9월 27일에 안동의 독립지사 세 분이 세상을 떠났다. 9월 27일마다 안동의 하늘과 낙동강물은 어쩐지 모르게 어둡고 침울한 빛을 띠지 않을까 여겨진다. 1985년 8월 15일 '안동 3.1운동 기념비'가 상아동 486-3(안동댐 월영공원 물문화관 옆)에 세워졌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통일 조국을 이루어 순국 지사들 앞에 내놓아야 비로소 안동이 환해지리라.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김동만#박재식#문소원#김동삼#안동독립운동기념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