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9월 17일)은 한가위 추석날이다. 나는 해남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장형 혜당 스님(황승우)이 해남읍에 살고 있고, 셋째 형 황지우 시인이 해남 현산면에 살고 있기 때문에 1년에 두 번은 해남에 간다. 예술은 '목적 없는 목적'이라 하는데,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을 보러 먼 길을 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인듯 하다.
광주에서 나주, 영암을 거쳐 해남으로 가는 이 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가던 길이기도 하다. 월출산이 보이면 버스는 이내 해남으로 꺾어지는 길로 들어선다. 어머니의 고향, 해남은 언제나 푸근하다.
버스에서 내리고 마트에 들러 과일과 고기를 사는 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의례의 하나다. 좋은 소고기를 듬뿍 사려고 하였으나 마트의 식품점에 소고기가 동이 나버렸다. 명절이라 택시 기사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내리니 해남읍을 한눈에 보고 있는 성불암이 나온다. 대문이 활짝 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동생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한데, 널찍한 성불암 마당은 따사한 햇볕만이 내리쪼일 뿐 인기척이 없다.
나는 가만히 정자에 앉는다. 이 정적이 마음에 편하다. 뜰에는 깻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성불암 마당의 고요는 형수님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삼춘, 언제 왔어요?" 형수님은 미수에 접어든 형의 노후를 보살피고 있는 여인, 하늘이 내려준 보살이다.
"형님, 저 왔습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 넉 자를 새겨 넣은 편액이 형님의 거처 입구에 걸려 있다. <도덕경>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떠올리게 하는 역설의 지혜다. "형님 저 왔습니다." 열두 시가 다 됐는데도 형은 주무시고 있나 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형은 나왔는데, "애구, 이게 뭐예요, 옷을 거꾸로 입었잖아요" 하면서 형수님은 마치 아이 다루듯 옷을 갈아 입혀 준다.
젊은 시절엔 그 장대하던 형의 몸집이 이제는 낙엽 떨어진 나무처럼 쓸쓸해 보였다. "광우야, 보고 싶었다. 연락도 안 되고..." 언제부턴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자주 눈물을 훔치는 형이 보기에 안쓰럽다. 형(1938년 생)의 현재는 20년 후 나(1958년 생)의 미래다. 나도 20년 후에는 저처럼 될 것이다.
창가에 풍금이 있어 나는 형에게 풍금을 쳐보라고 부탁했다. "형은 기타도 잘 치고, 풍금도 잘 다루는데 누구한테 악기 연주를 배우셨나요?" 답이 뻔한 질문을 내가 드린 것은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 "이런 것을 누구한테 배운다냐?" 역시 답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형은 전자 풍금을 켜기 시작했다. "찾아갈 곳은 없다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은 남인수의 노래다. 형은 악보도 없이 잘도 연주하였다. 나는 <목포의 눈물>을 쳐달라고 부탁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는 황씨 형제들의 18번지 노래다.
"형님, 5.16 군사쿠테타 때 있잖아요. 그때 군인들한테 자전거를 빼앗기고, 군대에 입대했잖아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지야. 가난한 학생의 생계수단을 빼앗았으니..."
"아버지는 언제 폐결핵에 걸리셨나요?"
"글쎄..."
"못 먹어서, 영양실조 때문에 걸린 병이었죠?"
"그랬지야. 나도 군대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했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형의 사진앨범을 열었다. 혹시 나의 옛 사진이 있을까 열어 봤다. 어라. 신혼 때 외갓집에서 찍은 내 사진이 있다. 색동옷을 입은 아내가 이렇게 예뻤구나. 언젠가 고마도를 방문하고 나오면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잊어버린 옛 모습을 다시 보니 참 신기했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기로 유명한 지우 형이 이내 당도했다. 뜰로 나가 보니 형수도 함께 오셨다. 얼굴이 까무잡잡해 한 달 전보다 더 건강한 느낌이 들었다. 형수는 한 달 전 광주에서 나를 만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후에 귀가 좋지 않은 것은 세상사를 더 이상 듣지 말라는 것이요, 눈이 어두운 것은 세상을 더 이상 보지 말라는 것인데, 노후에 기억을 상실한 것은 더 이상 세상사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인가? 형수는 지금 꿈나라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나는 광주일고 교지 <무등>에서 찾은 형의 글을 전해 드렸다. 형은 고2 때 "겨울을 맨발로 디디고 싶을 때"를 썼다. 형은 사춘기에 썼던 자신의 글을 읽어갔다. 1969년에 쓴 글이니 55년 전에 쓴 글이다.
간다. 온다. 아니, 간다. 가고 있다. 그러나 또는 오고도 있다. 누가 나를 형 한다. 나는 아니라고 한다. 우스운 것은 즐거운 것이다. 즐겁다. 즐거우면 웃어야 한다. 나는 대고 거리에서도 웃는다.
침이라도 뱉아 주고 싶다. 아, 침이 나온다. 내가 침을 뱉았더니 모두 웃었다. 모두가 웃으므로 나도 웃는다. 배가 난 사람도 웃는다. 꼬마도 웃는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야 한다. 밟아 버려야 한다. 그들이 만들어 낸 겨울을 밟아버려야 한다. 밟고 디뎌 서야 한다. 맨발로 디디고 싶다. 맨발로 디디고 싶다. 달린다. 나는 달린다.
나는 뜰에 자란 깻잎을 따기 시작했다. 텃밭에 들어가 고추와 가지를 수확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남의 밭에 들어가 몰래 따는 것도 즐거운데, 이렇게 형제의 텃밭에서 깻잎을 따니 얼마나 평안한가?
황지우 시인은 광주에 볼일이 있다며 일어서자고 한다. 형의 차를 타고 광주로 돌아올 수가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형과 독대할 수 있어 좋았다.
"너는 레귤러 인컴(regular income)이 얼마냐?"
"뭐, 한 오십 되요."
"그걸로 어떻게 살아?"
"그래도 큰 도움이 되어요."
서행하는 차 속,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돌아오는 길도 더뎠다. 1시간이면 충분한 길이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나는 지체가 싫지 않았다.
"정근식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출마했대요."
"그래?"
"서울대 사회학과는 교육학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조희연도, 김석준도, 다 사회학과 75잖아요? 정근식도 그렇구요."
"정근식이를 어떻게 알아?"
"제가 민주노동당 연수원장 하던 시절 있었잖아요. 그때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정근식은 말보다 글이 참 좋대요."
"내가 한예종 총장할 때 말이야. 당시 경기도지사 김문수를 만난 적이 있어. 관사에서 김문수를 만났는데, 그때 김문수가 '동생은 잘 있냐?'며 묻더라. 또 한 번은 한나라당 당사에서 의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재오가 따라 나오더니, 너의 안부를 물었지. 이영훈 교수 말이야. 참, 안타까워."
"저도 1994년, 복학하여 이영훈 교수에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새벽 1시까지 낙성대 근처 포장마차에서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어요."
"1987년 대선에서 내가 김대중 캠프의 홍보물을 만들었잖아? 그때만 해도 이영훈 교수가 나에게 와 김대중 선거 후원금을 주고 갔는데 말이야."
"안병직 교수가 중진자본주의론을 주창한 게 1988년이잖아요. 안병직 교수는 정말로 한국 경제가 오래 가지 못하고 파탄 날 줄 알았나 봐요. 그런데 한국 경제가 중진자본주의로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운동권을 떠났대요. 이영훈은 안병직의 수제자이고요."
"나에게 최초로 마르크스를 가르친 이가 이영훈이었어. 어머니랑 신림동에서 살던 시절(1976년)에 말이야, 이영훈은 집에 오면 어머니께 큰절을 드리곤 했는데 말이야."
차는 계속 서행으로 갔다. 형은 옆에 앉은 형수에게 광주에 다 오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조카 정아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빠, 어디세요?"
"응, 다 가고 있는데, 많이 밀린다."
"집에 와서 식사하세요."
"응, 삼촌이랑 가고 있다. 이따 보자."
나는 다시 교지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다.
"김용근 선생(광주일고 세계사 선생)이 교지에다가 르네상스에 관한 글을 썼는데요, 요지는 '개인의 발견'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인 것 같은데요, 많이 버벅거리는 글을 썼대요. 이민성 선생(광주일고 영어 선생)께서 글을 남기셨으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더라구요."
"여름날 무더운 날, 교실에 들어오셔서 이민성 선생이 소동파의 <적벽부>를 일필휘지하던 장면이 생생해. 그 덕분에 대학 교양과정 국어에 나온 <적벽부>를 내가 암송할 수 있었지."
"저는 이민성 선생께 황현의 <매천야록>을 배운 적이 있어요."
차는 어느덧 빛고을의 흰구름이 머무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형은 차를 세우고 가게에 갔다. 형수는 여기가 어디냐고 나에게 물었다.
"형수, 여기가 딸이 사는 집이잖아요."
"정이가 여기 산다고?"
"한 달 전에 이사 왔잖아요."
"나는 한 달 후 다른 데로 갈 거야."
"어디로 가는데요?"
"어디더라? 생각이 안 나네."
형은 와인 한 병과 안주 부스러기를 사 왔다. 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양이 보리가 '야옹' 하며 주인을 반겼다. 정이는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황광우 작가는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