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후-"
허리는 곧게. 시선은 정면으로. 머리를 짧게 친 남자가 양손에 20kg 덤벨을 들었다 내린다. 팔뚝과 허벅지는 옷을 뚫고 나올 듯하다. 이곳은 공덕역 인근의 PT숍. 운동하는 남자는 건강운동관리사 이도경(94년생, 만 30세) 코치다. 그런데 이 사람, 놀랍게도 비건(채소, 과일, 해초 따위의 식물성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이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와 보디빌딩 대회
이씨가 채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7살 무렵이었다. 대학원에서 영양학을 공부하면서 보디빌딩 대회를 준비하던 때였다. 시간이 남을 때마다 OTT 서비스로 요리 다큐멘터리를 보곤 했는데, 우연히 <더 게임 체인저스>와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을 보게 되었다. 두 다큐멘터리는 모두 육식의 해악을 알리는 내용이다. 대회가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식단을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1~2시간 뒤에 닭가슴살을 먹을 예정이었어요. 영상에 나온 정보를 몰랐다면 그냥 먹었을 텐데, 알고 나니까 찝찝해진 거죠. 냉동실에 소분해놓은 닭가슴살을 다 버리기보단 천천히 사실 확인을 해보기로 했어요. 하루에 네 번 닭가슴살을 먹던 걸 한 번만 고기를 먹고 나머지는 채식을 하는 식으로 바꿨어요. 그런데 운동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닭가슴살만 먹던 때와 비교했을 때 몸에 차이가 없는 거예요."
채식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대회가 한 달 남은 시점부터 완전 채식을 시작했다. 다큐멘터리를 본 직후에는 채식으로 어떻게 단백질을 효율적으로 섭취할지 몰라서 두부만 먹었다. 완전 채식을 결심하고 나서는 더 전문적으로 식사를 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영양학 공부를 하면서 균형 잡힌 채식 식단을 짰다. 그렇게 나간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채식해도 비채식인과 겨루어 순위권 안에 들 수 있구나.'
15년째 당뇨를 앓던 아버지를 위한 선택
사실 이씨가 비건의 삶을 살게 된 계기가 하나 더 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채식 식단을 천천히 늘리던 때, 문득 아버지에게 채식을 권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씨의 아버지는 15년째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어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이씨는 아버지의 무분별한 식단이 문제라고 판단했다. 채식을 권하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너는 고기 먹는데 왜 나는 못 먹게 하냐?"
직접 실천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씨는 완전 채식을 결심했다. 마침, 대회가 한 달 남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비건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채식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동생이 갈비가 먹고 싶다고 해서 이씨를 제외한 가족 셋이 갈비를 먹으러 갔다. 갈비를 세 점 먹은 아버지가 30분 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는 그날부로 고기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고기를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하는 상황과, 죽을 수도 있었다는 충격이 합쳐져 우울증에 빠졌다. 3개월 동안 아들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한참 뒤 어머니를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씨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빠. 나는 아빠 건강이 좋아질 해결책을 알겠는데, 아빠가 그걸 실천하지 않아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들 말 한 번 들어볼 수 없겠어?"
그제야 아버지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씨는 1년 동안 반찬 투정을 들어가며 아버지의 식단을 짰다. 아침엔 과일을 먹게 했다. 과일의 당이 정제당이나 액상과당과 다르게 당뇨에 나쁘지 않다고 설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점심과 저녁에는 산나물 비빔밥과 쌈밥처럼 평소에 아버지가 즐겨 먹던 한식을 차렸다. 고기가 없으니 배가 안 찬다는 말엔 더 먹으라고 대답했다. 1년 후, 아버지의 체중이 13kg 빠졌다. 속이 편해졌다. 젊을 때부터 앓던 변비도 사라졌다. 정기검진하던 의사가 어떻게 이렇게 건강이 좋아졌냐며 깜짝 놀랐다.
건강운동관리사에서 비건 인플루언서까지
이씨는 생활체육인으로서 강한 자부심을 품고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했다. 국민 건강을 증진하려는 꿈을 품고, 합격률이 낮은 것으로 유명한 건강운동관리사 자격증도 땄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력을 펼칠지 어려워하던 와중, 채식 식단으로 아버지의 치료를 도와드리면서 갈피를 잡았다.
"지식이 있는데 나누지 않을 수 없어요. 동물성 식단이 잘못된 걸 아는데,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 할 수는 없어요."
이씨는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히 게시물을 올리며 채식의 이점을 널리 알리려 노력한다. 현재 이씨의 계정은 3,800명이 넘는 사람이 팔로우하고 있다. 다양한 행사에 초청받아 영양학 강연을 한다. <아침마당>, <천기누설> 같은 공중파 프로그램과 여러 유튜브 채널에서 채식에 대한 편견을 깼다. UBC울산방송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출연해 당뇨를 극복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 운동하는 사람은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떤 식재료로 단백질을 챙기나요?
"일단,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단백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많은 유튜버가 체중당 2g만큼 단백질을 먹으라고 권유해요. 하지만 체중당 1.6g 이상 단백질을 먹었을 때 추가적인 이득이 있다는 연구 결과는 없어요. 심지어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체중당 0.66g을 먹으라고 권장해요. 저는 단백질을 적게 먹는 문제보다 과다 섭취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해요. 보디빌더의 평균 수명이 47세예요. 잠깐 반짝하듯이 몸을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과하게 먹어서 신장과 뼈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죠.
어쨌든 적당한 단백질은 중요하죠. 저는 곡류를 가장 많이 먹어요. 귀리가 가장 단백질이 많은 곡물이에요. 콩이랑 비슷해요. 100g당 11~12g 정도 돼요. 현미도 단백질이 많아요. 단백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통귀리와 현미를 많이 넣은 밥을 먹으라고 추천해요."
- 동물성 식단의 가장 큰 문제를 하나만 꼽아주세요.
"암을 유발한다는 거죠. 내독소, 헴철, 콜레스테롤, 그리고 고기를 구울 때 나오는 헤테로사이클릭아민이 맞물려서 심장병과 암이 돼요. 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생선은 먹이 사슬 아래에서부터 쌓인 환경호르몬과 수은이 가득해요."
- 채식이라고 다 몸에 좋을 것 같진 않아요. 채식 식단을 짤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
"채식한다고 샐러드만 먹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이론상으로는 풀만 먹어도 모든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고는 해요. 하지만 성인 남성 기준으로 양상추를 하루에 26통 먹어야 해요. 비효율적이죠. 곡류, 콩류, 과일, 약간의 견과류를 먹는 게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식단이에요.
그리고 많이 먹어야 해요. 성인 여성의 기초대사량이 1,300, 많으면 1,500칼로리예요. 성인 남성은 1,500에서 2,000 사이고요.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남녀 상관없이 3,000칼로리 정도는 먹어야 해요.
밥 한 공기가 300칼로리니까 하루에 밥 열 공기만큼의 식사를 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고기와 고열량 가공식품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건강한 식단을 꾸렸을 때 이렇게 많이 먹어야 한다는 걸 잘 몰라요."
- 채식에 대한 편견을 한 가지만 없앨 수 있다면 무엇을 없애고 싶나요?
"동물 단백질은 몸에 좋고 식물 단백질은 영양이 부족하다는 편견을 없애고 싶어요. 동물 단백질은 고기처럼 생겼으니까, 근육에 필수 아미노산을 잘 전달할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식물 단백질이 쌀과 브로콜리 같은 식재료를 만나면 닭가슴살과 똑같은 종류의 단백질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지 않을까요?"
부단히 채식을 홍보한 결과, 이씨의 영향으로 채식을 시작한 사람도 생겼다. 인스타그램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한 대학교 후배가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를 보고 비거니즘에 관심이 생겨서 공부를 해보고 싶으니, 도서를 추천해 줄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두세 권 추천했다. 얼마 뒤, 후배가 찾아왔다.
"추천해 준 책 다 읽었어요. 비건 음식점을 차릴 계획이에요."
비건 요리에 재능이 있던 후배는 다양한 비건 요식업을 시도해서 성공했다. 지금은 동탄에서 유일한 비건 전문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있다.
-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요?
"보디빌더로서 성과를 내기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할 계획이에요. 하지만 이제 보디빌더보단 건강운동관리사로서의 목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아는 지식을 가감 없이 가르쳐서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고 싶어요.
체육인 중에 가장 수명이 짧은 사람들이 마라토너랑 보디빌더예요. 둘 다 고기를 정말 많이 먹죠. 저는 몸만 좋은 보디빌더가 아니라, 건강한 보디빌더가 되고 싶어요. 80살, 90살, 100살까지 살아서 좋은 몸을 유지하면 그땐 사람들이 인정해 주겠죠. 채식이 옳았다고. 저는 생존해서 증명할 거예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