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30일 오후 6시 40분]
지긋지긋했던 폭염이 지나고 숨통이 트이는 가을이 다가왔다. 내가 사는 충남 부여에는 해마다 이맘때면 천오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백제의 시간이 거리마다 펼쳐진다. 평소와 다른 활기가 넘치고, 외국인들과 원주민과는 분위가 다른 관광객들로 인해 꿀석꿀석('시끌벅적'을 뜻하는 부여 말)해지면, 다들 안다. 백제 문화제의 시기가 온 것이다.
부여 사람들은 SNS에 백제 문화제 홍보에 열을 올리고 부여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하기에 바쁘다. 여러 홍보 매체에서도 '부여'라는 키워드가 부쩍 많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여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정, 분위기가 서서히 백제 문화제 모드로 전환되고 보이지 않게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지역의 축제는 원주민들의 참여와 외부 사람의 관심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흐름이 집중되는 것부터 시작이다.
"오 기자님, 큰일 났어요. 올해 백제 문화제가 망하게 생겼어요. 기자님이 좀 도와주세요."
지난 25일, 부여군청 공보실에서 이런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다급한 목소리다.
"혹시 오마이뉴스에 실려서 포털까지 오른 공주시 미르섬 부교와 유등에 관한 기사 보셨어요? 그 기사 때문에 우리 부여 방문객들까지 예약을 취소하고 난리가 났어요."
부여군청 공보실 담당 공무원은 거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마침 나도 그 기사를 읽었던 터였지만, 공주시의 문제가 어떻게 부여군까지 악재로 작용하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대중들은 백제 문화제와 공주를 같은 맥락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백제 문화제와 공주를 동일시하는 것 같아요. 공주에서 열리는 백제 문화제만 취소하면 되 는데, 부여 백제 문화제까지 취소하고 있으니 우리 부여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공보실 공무원은 하소연에 가까운 호소를 하고 있었다.
'부여'라는 키워드가 온갖 매체에 난무하도록 '부여 백제 문화제' 광고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여겼는데, 사람들이 공주와 부여의 백제 문화제의 차별성을 인식 못하는 바람에 예약 취소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정말 놀랐다.
백제 문화제는 부여군 예산으로 운영하는 축제라서 대형 기획사가 기획한다. 행사의 질이 높고 정교한 프로젝트로 움직인다. 나처럼 지역에서 소소한 이야기나 쓰는 기자가 쓸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어설프게 홍보한다고 돌아다녀봤자 표시도 나지 않아서 원주민으로 참여하고 즐기는 데 집중해왔었다.
부여군민과 공무원들이 1년 간 준비하는 행사
올해는 제70회 백제 문화제가 열리는 해이다.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공주와 부여 두 지자체에서 동시에 열리는 행사라 시너지 효과와 반사 이익은커녕 공주시의 실책으로 부여에까지 불똥이 튀고 대중의 눈총을 맞고 있다는 소식부터 듣게 되었다. 정보 전달이 정확하지 않고 충분하지 않기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부여의 백제 문화제는 부여를 알리고 백제를 기억하는 가장 큰 행사이다. 부여는 백제 문화제 개최로 인한 경제 효과도 크며, 공무원들과 부여군민들이 오로지 1년 동안 몰입해서 준비한 자존감의 산물이기도 하다.
백제 문화제는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에서 두 도시에서 각각 열린다. 웅진 시대와 사비 시대의 특색에 맞는 컨셉으로 개별적으로 운영한다. 행사의 컨텐츠가 달라서, 각각 즐기는 재미가 다르다.
부여에서도 백제 문화제를 위해 백마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유등을 띄우는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지만 일기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부교 설치 시기를 신중하게 보고 있었다.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축제팀(팀장 신병철)은 실시간으로 일기 예보 상황을 지켜보고 회의를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백마강 생태 기후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어 있어서 부교 설치에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부여 문화축제팀의 그런 노력 덕에 부여는 백제문화제 무렵에 폭우가 내려도 공주시 같은 행정력 낭비 상황을 빚은 적이 없다. 부여에서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공무원들은 안전사고 대비와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상시 대기할 정도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부여 사람들은 의자왕의 실정과 삼천궁녀가 추락한 낙화암 등의 부정적인 역사적 고정관념 때문에 이미 심리적인 열패감과 상처가 있다. 거기에 소금을 뿌리듯이 다른 지자체의 행태까지 덧씌우면 원죄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공주와 부여는 비슷하게 백제 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현재는 엄연히 다른 지방자치 단체이다. 백제 문화제와 연관된 키워드로 부여의 백제 문화제까지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을, 공주시에 항의할 수도 없어서 부여군에서는 냉가슴만 앓고 있다.
금동대향로 등 세계적인 걸작이 발견된 부여
작년 부여에서 발생한 홍수 피해로 매년 백제 문화제가 열리던 백마강 구드래 둔치 행사를 백제 문화 단지 백제궁궐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열었다. 시작은 궁여지책이었지만 찬란하고 우아한 백제궁궐이 있는 곳에서 알차게 펼쳐진 행사마다 찬사를 받았다.
전년도 같은 시기보다 더 많은 사람이 다녀갔고 컨텐츠가 풍부한 행사라고 입소문이 더 났다. 폭우 피해로 의기소침해 있던 부여군민의 기를 작년 백제 문화제가 잘 살려준 셈이다.
올해는 기획 단계부터 백제궁궐을 중심으로 축제 계획을 세웠단다. 가뜩이나 경기 불안과 기후 변화의 난제를 안고 부여군이 경기 활성화를 기대하며 백제문화단지와 구드래, 정림사지 등의 전 지역에서 백제 문화제 이벤트를 마련했다.
특히 부여는 금동대향로 같은 세계적인 걸작이 발견된 곳이다. 백제 미학의 특징을 잘 구현한 백제궁궐을 비롯한 백제의 문화를 집대성해놓은 곳이 백제문화단지이다. 백제문화단지는 안전 메뉴얼에 따라 볼거리 풍부하게 백제 문화제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으니 안심하고 방문해도 된다.
롯데 아울렛과 리조트, 넓은 주차장, 셔틀버스 운행 등의 인프라도 충분하다. 백마강도 가깝고 부여를 하늘에서 즐길 수 있는 열기구도 운영한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금동대향로와 정림사지 오층석탑 등의 역사 유물은 물론이고 부여 곳곳이 유네스코 역사 유적 지구이다.
개막식 전에 미리 백제문화단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잘 다듬어진 잔디광장 위에 매트를 깔아놓고 그냥 앉아서 쉬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외국 관광객들, 유모차를 끌고 찾아온 젊은 부부들이 한가로이 백제를 거닐고 있었다.
백제궁궐 정양문 안으로 들어서면 21세기의 사람들이 백제 왕국으로 갑자기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백제 의상을 입은 연기자들이 백제궁 안을 누비고 다니며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고 연기도 보여주는 연출도 훈훈하다. 궁궐 안이라 그런지 사람들조차 백제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많았어도 소란스럽지 않고 은근히 예절과 법도가 흐르는 것같은 품격이 있었다.
궁궐 배경의 사진은 어느 하늘을 향해 찍어도 감성 샷이었다. 예약 취소 사태가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과 젊은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많았다.
백제문화단지 안에는 백제인들의 생활 문화 마을도 있고 백제역사관을 통해 백제를 미리보기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옛 건축의 우아한 곡선미를 즐길 수 있는 야간 개장은, 주민 만족도까지 매우 높은 행사이다.
백제궁궐은 부여에만 있어, 부여 백제 문화제의 격을 높여주고 있다. 금동대향로를 만들어낸 사비시대 백제 예술혼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백제 문화제가 열리는 부여는 앞으로 10월6일까지가 1년 중 가장 황금기이다.
백제 문화제 시기에 맞춰 코스모스도 개화시키고 농산물도 수확한다. '부여다움'을 느낄 수 있는 부여의 옛 다리를 백마강에 놓고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해놓았다. 부여군민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갈아 넣어서 오직 백제 문화제를 위해 1년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여군청 공보실에서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지난 28일 개막식 행사에 18만 명이 다녀갔다는 통계가 나왔다. 공주시의 실책으로 인한 반사 이익을 우리 부여가 제대로 본 것인지, 작년에 다녀갔던 관광객들이 입소문을 좋게 내줘서 그런지 이유는 아직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부여의 백제 문화제를 찾았으며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증명된 셈이다.
9월27일~10월6일까지는 부여에서 백제 문화제가 성황리에 열리는 시기이다. 자세한 정보는 검색창에서 찾아보시라. 백마강에 풍덩 빠져서 배처럼 강을 건너다가 도로에서는 버스로 다니는 수륙양용버스는 가장 인기가 있으니, 어서들 부여로 놀러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