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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발전 이준상 노동이사는 9월 말 한전을 사직후 2018년 출범한 600억 규모 공공상생연대기금 집행위원장 맡아 제2의 인생을 펼친다
남동발전 이준상 노동이사는 9월 말 한전을 사직후 2018년 출범한 600억 규모 공공상생연대기금 집행위원장 맡아 제2의 인생을 펼친다 ⓒ 심명남

세 번의 해고와 세 번의 복직으로 오뚝이 같이 일어선 전력노조 여수화력 이준상 전 지부장. 노동운동의 정점인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손수 이뤄낸 그는 한전에서 노동이사제 도입 후 남동발전 초대노동이사가 되어 국가공공기관 노동이사협의회의 초대의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28일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전력에 입사해 35년 재직 동안 그가 일궈낸 가장 큰 업적은 2003년 한전을 분할하고 남동발전이 우선매각사로 선정되었을 때 남동발전비대위의장으로 우선매각을 저지해 끝내 민영화를 막아낸 일이라고 한다. 그는 가슴 벅찬 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이후 공공운수연맹 발전노조 위원장 시절 해고와 복직 또다시 해고의 칼날 속에서도 다시 복직되면서 노동자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한국남동발전 초대 '노동이사'가 되면서 국가 공공기관 노동이사협의회 의장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전에 입사한 구로공단 소년공... "여수가 나를 키웠다"

한전에서 35년을 몸담은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온몸으로 겪었다. 16살 구로공단 소년공 시절 정규학교에 들어가 교복을 입어보는 것이 꿈이었다. 이후 89년 한국전력에 입사한 그는 한림내연발전소 남제주화력발전소로 첫 발령된다. 이후 제주민주청년회활동 등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던 그는 92년 전력노조 직선제운동을 주장해 여수화력으로 부당 전출되면서 여수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96년 당시 전력노조 민주화 운동 시절 김시자(한일병원 지부장)열사분신대책위로 활동하다 3개월간 구속되며 노동운동의 잔뼈가 굵어갔다.

 2006년 발전5사 통합, 발전공사 설립 요구 파업투쟁을 벌이는 이준상 위원장의 모습
2006년 발전5사 통합, 발전공사 설립 요구 파업투쟁을 벌이는 이준상 위원장의 모습 ⓒ 이준상 제공

99년 전력노조 여수화력지부장을 역임하며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2002년 발전소분할· 해외매각저지 총파업 투쟁 당시 평조합원 신분으로 해고 및 가압류 31억 원을 받으며 이례적인 탄압을 견뎌야 했다. 이후 민주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과 여수시위원장 시절 여수이주노동자 인권센터 설립 대표를 맡아 여수지역 내 이주노동자들의 아픔을 대변했다.

2004년 남동발전 매각저지 비대위 의장이 되면서 마침내 민영화 매각 저지를 이뤄냈다. 그 뒤 2년 후 공공 운수연맹 발전노조 위원장에 당선된 그는 발전 5사 통합, 발전공사설립요구 파업투쟁에 나서 해고(2006)와 복직(2008 중노위 승소) 그리고 해고(2009 행정소송)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해고라는 혹독함 속에서도 시설관리 비정규직 경기도 가평 교원연수원에서 공공노련 비정규직본부장을 역임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던 그는 2018년 8월 문재인 정부 당시 노사특별협의회의 합의로 결국 남동발전에 복직했다. 그는 9월 말 사직을 앞두고 있다.

해고-복직-해고 등으로 이어진 세 번의 해고 인생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35년 정든 발전소를 떠나왔습니다>라는 퇴임인사를 통해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동발전 임직원 여러분! 이렇게 하직 인사드리려니 만감이 교차합니다"라면서 "초대 남동발전 노동이사 임기(23.02.15~25.02.15)와 정년퇴직(25.6.30)을 앞두고 9월 30일부로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사직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저는 1989년 한전에 입사하여 한림복합발전소, 남제주화력발전소를 거쳐 1992년 지금의 여수발전소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제에게도 희망에 부푼 미래만을 상상했던 신입사원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도 직선제로 뽑는 세상에 당시 노동조합은 지부장도, 본부위원장도 대의원들이 밀실에서 선출하는 게 납득이 안되어 직선제를 언급했더니, 하루아침에 부당 전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여수와의 인연도,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시발점도 되었습니다.

그는 이어 "1999년경부터 한전을 발전, 송전, 배전으로 분할하여 매각하겠다는 전력산업 특별법의 격랑 속에 자연스레 전력노조 여수지부장(99년), 남동발전매각저지 비대위 의장(2003년), 발전노조 위원장(2006년)을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3번의 해고와 3번째 복직 마침내 여러분들 덕분에 명예를 회복하고 2018년에 그토록 그리던 여수발전본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라며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이준상 남동발전 노동이사의 현장활동 모습
이준상 남동발전 노동이사의 현장활동 모습 ⓒ 이준상 제공

그러면서 "더더욱 영광스럽게도 초대 남동발전 노동이사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라며 "9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을 해왔지만, 여수지부장 2년과 발전노조 위원장 2년을 제외하면 저는 늘 교대근무 발전 운전원이었다. 생체리듬이 바뀌고, 명절에도 근무하느라 고향 한번 제대로 못 갔지만 발전 운전원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다. 그 자부심과 긍지의 바탕에는 발전소에 대한 애정과 우리 사회에 필수공공재를 생산 공급한다는 신념이 깊이 저며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감정이 한전에서 이어진 남동발전에서도 애착이 되었고 공기업으로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의무와 투쟁 의지로 발현된 것 같다"라며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남동발전이 우선 매각사로 선정되었을 때 비대위 의장을 맡아 모두 함께 싸워 매각이 저지되었을 때는 벅찬 감동도 있었다"라며 "2006년 발전노조 위원장 시절, 발전 5사 통합! 발전공사설립! 의 기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추진하고 싶은 왕성한 의지로 남아 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발전현장의 체험과 노동운동의 경험이 마지막에는 노동이사직을 수행하면서 임원의 시야로 넓혀지게 되었다"라면서 "30여 년 전부터 노동운동의 정점으로 꿈꿔왔던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이렇게 현실로 다가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늘 조합원의 입장을 대변하던 노조 활동에서 임원의 입장이 되어 회사의 경영 전반에 참여하면서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라며 노동이사까지 오른 경험을 털어놨다.

 마지막 회사를 떠나며 동료에게 고마음을 전한 이준상 노동이사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마지막 회사를 떠나며 동료에게 고마음을 전한 이준상 노동이사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심명남

그는 "무거운 책임에 비해 미약한 권한밖에 없는 회사 간부들의 고충을, 정부의 지나친 지시와 간섭으로 경영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임원들의 안타까움을 가까이서 목도하기도 하였다"라며 "노동이사로서 회사경영에 조언은 물론, 때로는 이사회에서 거친 설전과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고, 일부 사외이사의 비상식적인 언행에는 회사를 대변해 호되게 질책하기도 하였다"라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탈석탄, 에너지 전환시대는 우리가 두려워 떨어야 할 난제가 아니다"며 "우리의 기술과 전문 식견을 바탕으로 오히려 선도해 나가야 할 국가적 과제"라며 "저는 오늘 남동발전을 떠나지만, 발전산업에 대한 애정은 가슴에 품어 안고 간다. 또 다른 공간 더 넓은 자리에서 남동발전과 전력산업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파란만장한 35년 감회... 북받치는 눈물

마지막으로 "그동안 남동발전노동조합 김재민 위원장님과 전국의 지부장님 조합원 동지 여러분께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남동발전 김회천 사장님과 회사 간부 여러분 정말 고마웠습니다"라며 "그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던 남동 가족 여러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여러분을 만나 행복했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파란만장한 35년의 감회는 북받치는 눈물'이라고 말한 그른 이제 인생2막을 새롭게 펼친다. 2018년 출범한 600억 규모 공공상생연대기금 집행위원장을 맡은 것. '3번이나 해고됐지만 3번이 복직됐다. 그 비결이 뭔가'라는 물음에 그는 "노동조합을 통해 크게 적을 두지 않았다"라면서 "괴물과 싸우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되어버린다.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말"이라고 조언했다.

 여수발전소로 복직 후 사내 음악동아리 '락휴' 의 덕분에 공연후 한 컷
여수발전소로 복직 후 사내 음악동아리 '락휴' 의 덕분에 공연후 한 컷 ⓒ 이준상 제공

사측과 투쟁하고 싸우더라도 포용력 있게 마음을 다스리고 외골수가 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외골수가 되어버리면 주변 사람들이 내 곁에 오는 것을 꺼린다"라며 적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다. 회사에 복직해 "음악동아리 '락휴'를 만들어 매년 덕분에 콘서트를 펼친 것은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오퍼레이터로 입사해 최고의 노동이사로 간 것에 대한 소회를 묻자 "노동운동을 하다 경영자로 참여하다 보니 이사가 노동자를 대변하고 회사경영과 발전을 생각해야 한다"라며 "이사를 하면서 이사라는 권위에 휩싸여 본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기에 그 역할을 충실히 잘했다고 본다"라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마지막 35년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지역을 떠난 노동운동은 없다"라며 지역민과 함께하는 운동을 하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가평은 16년밖에 안 살아 고향이라는 생각이 안 들지만 32년을 살아온 여수가 나의 진정한 고향"이라며 "지금껏 노동운동을 하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해 주신 고마운 분들께 감사하고 잊지 않겠다. 공공상생연대기금 집행위원장직을 잘 수행하고 여수로 다시 와 내가 좋아하는 낚시 하러 다니며 남은 인생을 즐기고 싶다"라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구로공단#소년공#이준상#한전노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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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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