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0월 1일 윤억병(尹億炳) 지사가 타계했다. 나라가 망한 1910년 1월 10일 태어난 그의 본적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250번지이다. 26세이던 1936년 칠곡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동지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두산백과)."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대구 계성학교 학생 35명이 실형을 언도받아 고문과 투옥을 겪었다. 하지만 이는 대구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오미일평(五味逸平)의 판결문을 무미건조하게 인용한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1919년 당시 계성학교 재학생은 모두 46명이었는데, 그 중 76.1%인 35명이 만세시위로 구속되어 실형을 받았다"가 된다.
"1938년 2월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도 무심히 읽으면 '윤억병 지사가 1년 동안 수형 생활을 했구나!' 정도로만 받아들여진다.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명언은 이러한 숫자를 해석할 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윤 지사는 1년 동안 고문을 당하고 옥중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 구속된 1938년 2월부터 풀려난 1943년 2월까지는 5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의 "1938년 2월경에 체포되어,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라는 소개문을 정성을 기울여 읽어야 한다. 일제는 사람을 4년이나 미결수로 잡아둔 채 고문하고 감옥살이를 시킨 끝에 1년 징역을 살게 했다.
당시 함께 구속되었던 이두석 지사는 고문을 당하던 중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했다. 이창기 지사와 정행돈 지사는 1941년 3월까지 3년 이상 미결수로 갇혀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모두 '보안법' 위반이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고문 받다가 순국, 살아도 3년 이상 미결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윤억병'의 핵심 부분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1936년 6월 (중략) 동지구락부에 가입한 후 이두석·박형동·이석 등과 함께 산하에 설치된 성진회(惺進會)라는 독서회에서 활동하였다. 성진회 회원들과 함께 한국 역사, 어학, 문학, 사상 관련 서적을 읽고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사회운동과 혁명이론을 함양하기 위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회원들과 발표와 토론을 통해 계급의식도 높여갔다.
성진회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향약(鄕約)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일종의 친목계처럼 위장하여 운영하였다. 회합 장소도 왜관 한 곳으로 하지 않고 대구의 여관, 고찰 탐방처럼 위장하기 위해 성주·합천·울산 등지의 사찰에서 모임을 가졌다.
1938년 2월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오랜 기간 미결수로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1941년 3월 8일 예심을 마치고,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오랜 기간 미결수로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부분에 새삼 눈길이 간다. 독립지사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글을 읽은 덕분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