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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은 1955년 태어났고 30년 전인 1994년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그리고 부모님을 곁에 두고 담도암으로 운명했다. 40세도 채 안 된 나이였다. 그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 삶을 바친 '전업활동가'였지만 한국현대사에 그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의 사후 30주년을 맞아 지난 8월 한홍구 교수를 포함 그의 지인 5명이 공동으로 집필한 <이범영 평전>을 펴냈다. 추도식과 북토크가 함께 열렸다(관련 기사: "이범영이 뿌린 씨앗, 이제 꽃 피우고 있다" https://omn.kr/29rgj ) '왜 사후 30년이 넘도록 지인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평전을 낸 것일까?'가 궁금했다.

이 책은 이른바 '격동의 시대' 혹은 '혁명의 시대'라 불리던 지난 1980년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직업운동가' 이범영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 1980~90년대 고인과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5명이, 고인의 삶, 민주화에 대한 공헌, 사회참여동기를 이룬 사상배경,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고인의 의미 등 크게 네 분야를 나누어 썼다.

 표지
표지 ⓒ 백산서당

고인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온 삶을 바치다가 이 땅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최근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부끄럽게도 고인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또한 고인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이룩한 이 땅의 민주화에 대한 그의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알지 못했다.

이 책 공동저자 중 한분인 이승환 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아래 민화협) 공동의장과 이 책과 관련 지난 한 달간 수차례 인터뷰를 실시했다. 다음은 그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매 고비 때마다 '그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물었다"

 이승환
이승환 ⓒ 이승환

- 먼저 이 책을 내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무엇인지?

"한국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후배세대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나라 중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고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삶을 내던진 고난 속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점을 절절이 호소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미 세상을 뜬 지 30년이 지난 이범영은 이름 석 자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명망가도 아니고 세상을 뒤흔든 대사건의 주역도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봄으로써, 민주화운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모욕당하고 있다고 느낄 만큼 암울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 이 책을 다섯 분이 공저를 했는데 그 이유는?

"다섯 사람의 공동작업으로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처음에 집필자로 지목받은 내가 시민운동과 통일운동으로 바쁘다는 핑계와 게으름으로 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고인 30주기를 넘기지 말고 반드시 책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의무감을 내세워 여러 선후배들에게 부담을 떠넘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세대 민청련운동의 증인이자 고인의 농법회 직속후배인 권형택, 고인에게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운동과 북한이해에 큰 영향을 준 역사학자 한홍구, 한청협 집행부의 중심적 역학을 했던 이원영, 한청협 운동으로 박사논문을 썼던 이창언, 그리고 고인과 청년운동‧통일운동 등의 운동적 고민과 실천궤적을 함께 했던 이승환 등 5명의 필자는 이 책 작업에서 나름 최상의 조합이었다.

이 조합으로 이범영 약전 권형택, 청년운동사 이원영, 운동사상에 이승환과 이창언, 평가 한홍구, 전체수정과 조정 이승환 등으로 쉽게 평전집필의 역할분담이 가능했고, 각자 맡은 부분에 누구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이 책이 주로 고인의 민주화운동과 사상에 중점을 둔 이유는?

"고인의 운동과 사상 흐름을 통해 1980-9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나아가 그 시대자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30년 후의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고인을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됐나. 그가 삶에 미친 영향은?

"내가 고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고대 1학년이던 76년 10월 하순경 농업문제를 공부하는 학교간 연합 공부모임에서였다. 이 공부모임은 아마도 서울대 농법회가 중심이 되었던 일종의 범대학적 서클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서클에서 나는 당시 서울대 4학년이던 고인을 처음 만났다. 그 모임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그가 76년 서울대 12.8 유신반대 데모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졸업을 두 달 앞두고 구속된 고인의 투쟁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후 나도 78년에 유신반대 학생시위로 구속되었지만, 출소는 79년 그와 비슷한 시기에 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고인과 나는 80년 병역문제대책위를 거쳐 82년부터 서울대와 고대 등 학생운동의 대학간 연대활동, 그리고 민청련과 한청협 활동 등 그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선후배이자 동지로서 거의 동일한 운동적 궤적을 공유해왔다.

민청련 내 유명한 논쟁이던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과 조직논쟁에서도 우리는 대부분 같은 입장을 가졌고,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의 결합이나 통일운동 방향을 비롯한 대부분의 운동적 고민에서 비슷한 입장을 공유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이후에도 나는 새로운 통일운동체 논쟁, 합법정당 논쟁 등 운동적 논란은 물론이고 운동과 생활 등 개인적 고비를 맞을 때마다 '이때 그는 어떻게 대처했을까'를 생각하면서 나의 진로를 결정했을 만큼 그는 실천적으로 나의 삶과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고인의 역할과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나?

"고인은 한국민주화운동이 배출한 최초의 전업운동가다. 고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루 24시간 모두를 오롯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한국민주화운동의 성장과정과 자신의 성장과정을 일체화시키고 있다는 '존재론적 의미'에서도 직업적 민주주의운동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서울법대 졸업직전에 '보장된 기득권의 삶'을 내던지고 유신반대투쟁의 깃발을 든 책임 있는 투쟁가였고, '아직도 청년이냐'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의 대중화와 투쟁의 정치적 상승의 결절점(여러 가지 기능이 접목되어 집중되는 지점)에 '청년운동'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자각하고 청년운동을 통해 '정치적 대중운동' 발전을 단기간에 이끌어낸 개척자였다.

또 과감한 민청련 해소와 전국적인 청년통합조직으로서의 한청협을 건설함으로써 '지역의 재발견'을 통한 운동의 진정한 전국화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그는 80년대 중후반 운동의 급진화의 상징인 NL운동론을 일정하게 수용하면서도 교조주의적 NL 수용과 다른 차원에서 한국적 변혁운동의 길을 정립하기 위한 '창조적 노력'을 잠시도 늦추지 않았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민주주의운동사에서 빛나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도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디서나 눈에 잘 띄는, 이 책의 부제 그대로 '이 강산의 키 큰 나무'다."

- 고인은 1988년 9월 11차 민청련 총회에서 민청련 의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민청련 내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았지만 당시 왜 젊은 활동가들은 고인에게 주목했나?

"청년운동의 대중화라는 측면과 NL운동에 대한 수용성 문제 탓이었다. 민청련 세대교체라고 이야기되는 10차 총회의 지도부가 청년운동의 대중화와 지역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새로 유입된 80년대 학생운동 출신활동가들은 10차 총회 지도부의 활동방식이 1980년 6월항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 엘리트주의적 선도투쟁 위주였던 민청련의 관성과 단절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10차 총회 지도부에 비해 오히려 나이는 더 올라가지만, 청년운동 대중화와 지역화에 보다 더 적극적 태도를 가지고 있던 민청련 정책위원회의 이범영, 이승환, 유기홍 등과 더 많은 교감과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NL이라는 새로운 운동사조에 매우 적극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이승환, 한홍구 등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과 북한, 주체사상 등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하고 있었고, 고인은 이들을 통해 NL운동론에 대해 많은 선행학습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NL운동에 대한 고인의 남다른 이해는 선배세대와 새롭게 등장하는 80년대 학번세대를 연결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후배들 관점에서 보면, 고인은 선배세대 가운데 드물게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사람이었고,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선배였다.

즉 고인은 자신의 운동적 발전과 함께 80년대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NL운동의 단순 '받아쓰기'가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면서 자기가 발 딛고 선 현실과 대중 속에 뿌리내릴 것을 끊임없이 촉구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고인은 선배세대 운동의 긍정적 유산의 최대상속자였던 동시에, 그 유산을 후배들과 나눠 쓰며 함께 발전해 간 공진(共進)을 실현한 사람이었다."

"허당미 있던 이범영... 이삿일 좀 도우라니까 화분에 물을 줬다"

 저자 이승환
저자 이승환 ⓒ 이승환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일은? 또 느꼈던 보람은?

"힘들었던 점은 기억의 단속과 불분명함이었다. 글을 쓰면서 30년이란 세월의 힘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었던 게 언제였는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공동작업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억의 혼선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내 경우는 고인의 불꽃같은 삶이 가장 활활 타올랐던 80년대 말 이후 서로 번갈아 감옥에 갔고(89.12~91.2/92.3~92.9), 또 출소 후 93년 3월부터 사실상 고인의 투병생활이 시작됐기 때문에 가장 기억할 것이 많아야 할 시기에 고인과 나는 가장 소원하게 지낸 것이 책 집필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책을 쓰면서 얼마간의 보람이나 자부심을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선배활동가들에 대한 평전이 전문필자 등에 의해 쓰이는데, 그렇게 쓰인 평전이 때로는 그 평전의 주인공과 함께했던 동료나 가족들의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그에 비해 이 책은 그래도 그와 함께 활동했던 분들, 그중에서도 그와 가까웠고 그가 특별히 생각나는, 그리고 그와 그 시대를 바닥까지 잘 아는 사람들이 만든 책이라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이는 이 책이 적어도 고인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그리움 넘치는 마음으로 쓰인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이범영도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었을 것 같다. 고인의 한계는 무엇이었다고 보나?

"'책임과 헌신' '개척과 돌파' '창조와 선각' 등 민주주의운동가 고인과 어울리는 많은 수식어와 달리 그 역시 많은 약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때로 '허당'과 '완고' 그리고 시대적 한계로 번뇌한 이었다. 그의 '허당끼'에 대해서는 집이 이사하는 날 애들과 놀고만 있는 그에게 형수가 이삿일 좀 도우라고 역정을 내자 화분에 물을 주더라는 유명한 얘기가 있으며, 생활고 해결을 위해 고민을 나누자는 형수의 이야기에 '결혼하기 전에 경제문제는 당신이 해결하고 나는 운동만 하기로 했지 않느냐'고 정색했던 그의 철없는 '완고함'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암이 전신에 퍼져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 운동때문에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완고와 불성실, 열지 못한 마음이 준 상처와 불효에 대해 회한(悔恨)했다. 직업적 민주주의운동가로 살기 위해, 오롯한 운동에의 헌신을 위해 그가 보지 않았거나 소홀히 했던 문제들이 죽는 순간까지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한 직후 바로 아내에게 전화해 뒤늦은 화해를 요청하고 회한을 토로했다. 이를 두고 고 김근태 선배는 고인의 죽음이후 그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아무런 한도 남기지 않고 떠난 삶'이라고 평가했다.

고인의 시대적 한계는 1980-9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계와 그대로 일치한다. 이에 대한 것은 이 책 전반에서 다루는 문제이지만, 핵심은 혁명의 시대에서 '선거와 제도정치' 혹은 '일상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운동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인의 미완의 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당정치운동이 아닌 전선운동의 고수와 민주연합정부에서 제도정치시대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찾았지만, 고인의 해법은 시민 혹은 민중운동의 쇠락과 전선운동의 소멸 혹은 약화, 그리고 정당정치의 대중운동 대체 혹은 혼용상황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 더 이상 적용되기 어려워 보인다.

또 민족화해에 입각한 1990년대 통일운동은 '두개의 국가' 인정과 통일포기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적 '분단관리' 요구 앞에 점점 위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는 그와 그의 시대를 넘어서야 하는 우리 모두의 새로운 과제일 것이다."

- 20세기를 살았던 고인의 삶과 사상으로부터 본받을 점이 있다면?

"고인의 성장과 진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진보와 일체화되어 있다. 한국전쟁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완전 말살시켰지만 4.19운동을 통해 부활했고, 유신체제와 군부독재의 폭압 속에서도 수많은 이범영에 의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성장하고 진보해왔다.

세대를 넘어 민주주의운동을 지속시킨 고인의 노력, 그리고 자신이 마주한 시대적 과제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헌신, 격동과 혁명의 시대에서 교조와 팬덤을 넘어 자기 머리와 발로 현실을 이해하고 한국적 변혁의 길을 찾고자 했던 수많은 이범영의 노력은, 오늘 전혀 다른 과제와 고민 속에 살고 있는 후진들에게도 여전히 전해져야 하는 귀한 '역사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 이승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984.09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2008.02 경남대 북한대학원 석사과정(정치‧통일 전공) 졸업
2011.09 경남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 수료
1985-92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정책위원장 및 부의장 등 역임
1992-96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정책위원장 및 부의장 등 역임
1998-00 통일맞이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사무총장
2000-12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처장, 집행위원장 등 역임
2013-15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2015-17.11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
2013-17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2017.12-19.6 통일부 산하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
2019.6-20.12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차관)
2021.3-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현)
2021.2- (사)통일맞이 이사장(현)
2005.07 통일부장관상 수상
2017.05 제20회 정일형·이태영 자유민주상 수상
2017.10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저서: 『민족화해와 남남대화』(공저) (한울아카데미, 2001)
『포스트 통일, 민족적 연대를 꿈꾸다』(공저) (한국문화사, 2016)
『변혁적 중도론』(공저) (창작과비평, 2016)
『통일담론의 지성사』(공저), 서울: 패러다임북, 2016 등이 있다.


이범영 평전 - 이 강산의 키 큰 나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은이), 백산서당(2024)


#이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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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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