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가 타결되었다. 어제(10월 4일) 발표된 외교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2026년 한국이 미국에 지불할 방위비 분담금은 2025년 대비 8.3% 증가한 1조 5192억 원이며 이후 소비자 물가 지수(CPI) 증가율(2% 예상)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인상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연간 증가율 상한선 5%를 재도입한 점, 지난 11차 협상에서 도입됐던 국방비 증가율 연동 인상율을 소비자 물가 지수로 변경한 점, 미군 역외 자산 정비지원을 폐지한 점 등을 거론하며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협상 결과라 자평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자화자찬으로 들린다.
돈 먼저 주고 쓸 곳을 정하는 협상
우선 이번 협상에서도 방위비 분담금은 총액형으로 결정되었다. '총액형'은 한국이 미국에 지불할 방위비 분담금의 총액을 미리 정하고 그에 맞춰 사업비를 책정하는 방식이다. 도대체 어떤 나라가 필요한 지출처를 미리 산정하지 않고 달라는대로 주는 방식으로 예산이 책정되는지 궁금하다.
때문에 사업별로 필요한 소요액을 산출하고 그에 맞춰 지급하는 '소요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나 이번 협상 역시 미국의 요구대로 총액형으로 결정되었다.
협상 타결 직후 외교부 관계자의 "협상단에서도 (소요형 도입에) 상당히 주안점을 두고 제기했으나 한미 간의 이견이 있었다"는 발언은 이를 드러낸다. 이번 협상 결과가 합리적이지 않은 첫 번째 이유다.
연관된 또 다른 문제는 방위비 분담금의 다른 표현인 '주한미군 주둔에 따른 비용'의 총액을 한국정부는 모른다는 점이다. 테이블에서 미국 협상단은 전체 주한미군 운용비 중 한국이 부담하는 수준이 30% 수준이어서 분담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주한미군 주둔 경비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무턱대고 "더 필요하니 달라"는 것이고 "그럼 이만큼 더 줄게"가 협상의 실상인 셈이다.
1조 7000억 원 쌓아 놓고 더 달라는 미국
더군다나 현재 미국은 한국으로부터 받은 방위비 분담금 중 1조 7700억 원의 돈을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소위 '미집행금'이라 불리는 돈이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대부분 군사건설분야 분담금으로 다년간 계약이 돼있어 지급될 예정인 돈"이라고 미국 입장을 대변하지만 미국은 이미 이 미집행금을 악용한 전례를 갖고 있다.
2000년 대 초반 한미는 경기북부와 용산의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고 평택미군기지를 확장하는 비용을 절반씩 부담하기로 했으나 미국은 한국이 주는 방위비 분담금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했다가 자신들이 부담해야 했던 비용으로 전환해 사용했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축적해둔 돈에서 나온 이자가 1600억 원에 달했다는 기사가 나온 바도 있다("[단독]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잔액 이자만 5년간 1600억대 추정", 2013년 11월 19일자 한겨레신문 보도)
준 돈을 제대로 쓰지도 않고 더 달라는 미국과 여기에 조응해 돈을 주는 한국, 이번 협상이 합리적이지 않은 두 번째 이유다.
평택미군기지 다 지었는데 또 어디에?
외교부가 보도자료를 통해 방위비 분담금의 상승 요인으로 거론한 내용에는 군사건설 분야에서 우리 국방부가 사용하는 건설관리비용 증액으로 인한 상승 분이 있다.
방위비 분담금은 크게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 주한미군 기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인건비, 주한미군 시설 건설 및 유지를 위한 군사건설비, 주한미군 장비 지원에 필요한 군수지원비이다.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건설관리비와 국방부가 사용하는 건설관리비가 어떻게 구분되고 구성되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군사건설비 항목이 주요 증액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급한대로 평택미군기지가 완공되며 군사건설비의 비중은 대폭 줄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여의도의 5배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해외 미군기지 건설이 완료되었는데 또 어떤 건물들이 더 필요할까?
소요형 협상이었다면 평택미군기지가 완공된 이후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군사건설비의 대폭 감액이 불가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협상이 '건설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원칙도 기준도 없이 올려주기만 하는 협상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전 협상에서 방위비 분담금의 인상률을 국방비와 연동했던 것을 다시 소비자 물가 지수와 연동함으로써 향후 5년 간의 기간 동안 인상률을 억제했다며 이번 협상 결과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필자가 지난 2021년 3월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 언급한 바 있지만(
"방위비분담금의 치명적 모순, 낼 가치 있는 돈인가", 2021년 3월 15일자 오마이뉴스 보도), 이는 외교부가 자화자찬할 일이 아니라 방위비 분담금의 인상률과 관련해 제대로 된 기준도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필요한 만큼, 때에 따라서는 더 주고 때에 따라서는 덜 줄 수도 있는 비용을 매년마다 무조건 올려주기로 한 협상, 또 협상 때마다 바뀌는 기준 등 현재 한미가 하고 있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그 어떤 합리성도 찾기 어렵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미군 역외자산 정비지원금 환수해야
외교부의 보도자료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내용은 미군의 역외자산에 대한 정비지원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역외 자산 정비지원금은 일본 등 미국의 다른 나라에 배치된 주둔 미군의 무기 등 정비비도 한국이 주는 방위비 분담금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21년에는 1088억 원의 방위비 분담금이 미군의 역외 자산 정비비로 사용된 사실이 밝혀진 바도 있다("9000억대 미집행금·역외 정비 비용 논란", 2021년 3월 11일자 세계일보 보도).
방위비 분담금이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에 대한 비용에 대한 한국 측 부담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 용도에 따르지 않은 불법적인 지출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제도 개선의 내용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그 내역을 철저히 따져 환수해야 할 금액이다.
미국 정치 일정에 좌우되는 협상, 부끄럽고 굴종적
마지막으로 지난 방위비 분담금 협정 기간이 1년도 더 남은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이번 협상이 타결된 이유와 관련해 올 해 말 예정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경우 한국이 더 큰 금액을 낼 수도 있다며 빨리 타결된 것이 잘 된 것이라는 의견들이 개진된다.
그러나 이야말로 한국이 미국에 얼마나 굴종적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과 인식으로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과 관련한 명백한 규정을 두고 있다.
"미국은 본 협정(한미상호방위조약)의 유효기간 동안 대한민국에 부담을 과하지 않고 합중국 군대의 유지에 따르는 모든 경비를 부담하기로 합의한다"(SOFA 제5조 1항), 한국은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시설과 구역을 제공할 의무를 질 뿐"이다(SOFA 제5조 2항). 1991년 한미가 특별협정의 형태로 방위비 분담금을 주기 시작한 이래 30여 년이 기간이 흐르며 주객이 전도되고 원칙과 예외가 뒤바뀌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 일정에 따라 급조해 협상을 진행하고 전혀 '건설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협상 결과를 자찬하고 오히려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며 변명하기에 급급한 듯한 정부의 행태를 보며 부끄러움과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