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
땅굴 견학
"산업시찰이라고 하면서 왜 땅굴 견학을 합니까?"
"아. 공단 견학도 할 겁니다. 우선 첫 순서로 땅굴을 가는 것뿐입니다."
한 회의 참석자의 질의에 사회자가 진땀을 흘리며 답변을 했다. 참석자 대다수의 입이 튀어나왔지만 이날 안건인 '산업시찰 참석 여부'에 대해 명확히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이는 없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사회자가 진행봉을 막 두드리려 할 때였다. 손을 번쩍 든 정진동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지조를 지켜왔는데 결국 머리를 굽히는 것입니까!"
"어허. 정 목사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뭡니까?"
"계속해서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 우리 단체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정진동의 항의에 회의 주재자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쩔쩔맸다.
"정부의 반공 선전전에 놀아나려는 겁니까!"라며 격분에 찬 정진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1975년 6월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의 한 기독교단체 사무실에서 열린 이날의 회의는 정부가 주관하는 산업시찰에 도시산업선교회가 참석하느냐 마느냐가 쟁점이었다. 전국 각지의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내심 정부의 산업시찰에 반대했다. 산업시찰이라고 하면서 공단이나 대규모 공장의 선진지 견학이 아니라 땅굴 견학과 유원지 관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중앙정보부가 주관한 '산업시찰'은 이때 처음 거론된 게 아니었다. 중앙정보부는 산업시찰을 통해 반공 분위기를 강화하려고 사회 각계와 단체에 접근했다. 마지막 포섭대상이 산업선교회였다.
휴전선 인근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에서 1974년 11월 15일 땅굴이 처음 발견됐다. 강원도 철원에서 2차 땅굴이 발견된 것은 1975년 3월 19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북한의 남침 시도 일환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공 선전을 펼쳤다.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북한군은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전무장한 군인 120명을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때가 한국전쟁 이후 남북의 긴장 관계가 최고조로 형성된 때였다.
1972년 미국과 중국이 관계 개선을 하면서 소위 '데탕트(détente)'정책이 추진됐다. 이의 영향을 받은 남북은 한반도 긴장 완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마치 한반도가 금방 통일될 것 같은 분위기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급속하게 냉각됐다. 남에서는 유신체제가 성립됐고, 북에서는 유일 체제가 성립됐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흐름과는 반대로 냉전체제로 회귀하는 때에 땅굴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때다' 싶게 반공 선전에 열을 올렸다. 이의 일환으로 초등학생부터 시골 노인들까지 땅굴 견학에 동원됐다.
땅굴 견학은 민주화단체에도 실시됐다. 심지어 그 여파가 도시산업선교회까지 미친 것이다. 정부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데 땅굴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여러 차례 정부의 산업시찰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땅굴 견학 제안을 거부했다. 물론 산업시찰에는 땅굴 견학만이 아니라 관광도 포함됐다. 그런데 지속된 정부의 제안(압박)에 도시산업선교회 지도부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긴급조치 위반?
청주에 내려온 정진동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 주도의 산업시찰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정부 주관의 산업시찰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편지로 써 전국의 도시산업선교회에 발송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숱하게 있고 돼지고기 한 근 마음 편히 사 먹지 못하는 민중들이 도처에 있다. 그런 마당에 아무리 공짜라지만 정부가 시켜주는 견학과 관광은 양심상 응할 수 없다. 다만 가시는 분들의 여행이 즐겁기를 바란다."
정진동의 편지를 받아든 안광수 목사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정진동 목사가 공개 선언했기 때문이다. 서울 구로공단에서 경수산업선교회 실무자로 있던 그는 자신도 산업시찰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정진동 편지의 말미에 자신의 입장을 써, 이를 복사에 전국 도시산업선교회에 발송했다.
전국의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은 정진동과 안광수의 편지가 '가려운 데 등 긁어주는 격'이었다. 자신들도 정부 주도의 산업시찰에 가기 싫었는데 정진동이 총대를 맸기 때문이다.
결국 도시산업선교회가 산업시찰을 가지 않기로 하자 중앙정보부는 청십자회를 섭외했다. 청십자회가 산업시찰 버스에 타는 날 청주에서는 정진동이 경찰에 연행됐다. 1975년 6월 16일이었다.
경찰은 정진동에게 유신헌법 위반 운운했다. "정 목사. 당신 때문에 산업선교회 대신 다른 팀(청십자회)이 가게 됐소. 이것은 현재 정부 시책에 반대되는 것으로 유신헌법에 위배 되오"라는 내용이었다.
정진동은 기가 막혔다. "당신들 같으면 동료가 굶고 있는데 아무리 공짜라지만 호화 여행을 가겠냐!" 정진동의 정당한 항변에 경찰들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정진동은 이틀 만에 풀려났다. 정진동이 연행됐다는 소식에 청십자 회원들은 모금을 해 정진동에게 줬다. 정진동은 석방된 후 모금된 돈 3만5000원과 후원자 명단을 받았다. 모금 명단을 손에 쥔 그는 실소했다. 그 명단에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 산업시찰 담당 김아무개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패넌트 제작
충북노회에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해체하고, 다시 부활시킨다고 했다가 무산된 것이 1974, 1975년이었다. 그런데 도시산업선교회 시찰 문제가 1975년 6월에 터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정진동은 자신의 신앙과 원칙대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지만 충북노회의 재정이 끊어진 상태였기에 청주산선의 살림살이는 옹색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이 벌어진 1973년부터 경찰서 정보과에서 정진동을 수시로 연행하고 감시했다. 정진동은 청주산선 살림살이를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 청주시 사직동 집에 청주산선 사무실을 차린 것이다.
충북노회가 경찰의 탄압과 압박에 못 이겨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해체했지만, 지역의 일부 여론은 정진동에 우호적이었다. 특히 기독교장로회 청년·학생들이 그랬다. 청주제일교회 이연수·김형철·나채운과 서부교회 김치영, 청주 YMCA 회원 송창화(청주대 학생), 그리고 백승모(청주대), 정광옥(서남교회) 등이 청주산선 돕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1975년 9월이었다.
작은 천으로 패넌트를 제작했다. 천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밥)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라는 누가복음 4장 19절 말씀을 적어 넣었다. 도시산업선교회 정신을 천에 담은 것이다. 청년들은 청주 시내 각 교회를 다니며 패넌트를 판매했다.
청주 시내는 김치영 등이 주로 다녔고, 이연수는 전국 각지를 다녔다. 이 일로 인해 이연수는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노력이 커다란 성과를 내지 못할 때였다. 희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에서 선교사 더스트가 패넌트 1000개를 주문했다. 청년·학생들이 발 벗고 나선 지 한 달이 채 안 된 10월 7일이었다.
이삿짐 싸기 전쟁
정진동은 사무실을 마냥 집에 둘 수는 없었다. 이때 서울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은 이가 있었다. 활빈교회 전도사 김진홍(1941년생)이었다.
김진홍은 1971년 10월 3일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세우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쳤다. 이후 청계천 거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 남양만으로 내려가 두레마을을 세우고 개척 사업을 진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진홍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는데 경제적 지원을 해줬다. 이로 인해 정진동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활빈교회'라는 간판을 새로운 보금자리에 내걸었다. 1976년도였다. 김진홍의 지원은 그해에만 이뤄졌다.
하지만 시련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무실을 얻으면 경찰서 정보과에서 건물주를 찾아갔다. "정진동은 빨갱이오. 그에게 사무실을 빌려주면 당신이 큰코 다칠 줄 아시오"라고 협박을 했다. 그때부터 이삿짐 싸기와 사무실 임대 계약, 해지, 새로운 사무실 임대는 반복됐다.
"당신이 뭔데 함부로 간판을 떼는 거요!"
"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는 거요?"
"아무리 건물주라고는 하지만 계약기간이 있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계약금을 돌려주겠다는 것 아니오."
정진동과 건물주의 입씨름이었다. 잠시 흥분했지만 정진동은 이내 침착해졌다. 황당했지만 건물주 입장이 이해가 되어서였다. 그들도 경찰서 정보과의 압력에 의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여관에서 세미나 열어
"신부님. 세미나 장소를 빌려주는 곳이 없네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한구 신부를 찾아간 정진동의 하소연이었다. 사회선교협의회가 주최하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평가 세미나'를 개최할 장소를 구하지 못해서였다. 아무리 유료로 장소를 빌리려 해도 청주경찰서 정보과의 방해 공작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이한구 신부는 서울 주교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서울에서 청주교구에 직접 연락을 해 "장소에 협조하라"고 했다. 청주시청 부근의 청주교구에서 세미나를 열기로 결정되었다. 행사 당일인 1975년 11월 27일 청주교구청 정문은 원천봉쇄됐다.
"당신들 뭐 하는 거요! 왜 합법적인 행사를 막는 거요?" "...." 정진동의 항의에 전경 뒤에 몸을 사리고 있던 정보과 형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계속되는 항의에 청주경찰서 김O선 정보계장이 나섰다. 잠시 후 그의 오버액션이 연출됐다. "어어어~" 하면서 행사 관계자에게 떠밀려 넘어지는 척 거짓 연기를 했다.
행사 관계자들은 기가 막혔지만 장소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서운동성당으로 옮기기로 했다. 결국 그곳도 경찰의 방해로 행사를 열 수 없었다. 다시 옮긴 것은 시내의 산장여관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이곳에서는 세미나를 열 수 있었다. 여관에서는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출입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행사 참가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행사 내용을 수첩에 빼곡히 메모했다.
1박2일로 진행된 세미나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둘째날 행사가 끝나고 문제가 또 발생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참가자들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표를 끊었을 때다. 한 무리의 경찰이 오더니 "잠깐 서에 갑시다"라고 했다. 정진동과 행사 참가자의 항의에 경찰들은 "당신들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연행합니다"라고 했다.
1975년 5월 13일부터 시행된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부터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하는 행위, 법 개정을 청원하는 행위 일체를 금한다'였다. 세미나가 긴급조치 9호 위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