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차유진의 사는이야기입니다.[기자말] |
판사가 잠시 휴정을 선언하자, 복도로 방청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무리 속에 피고인의 가족들도 섞여 있었다. 담당 변호사를 에워싼 채 오로지 그의 다음 말을 주시할 뿐, 넌지시 지켜봐도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가족의 심중은 무거운 바위에 짓눌린 듯 깊이 가라 앉아 있었다. 피고인의 어머니는 단 1년이라도 형량을 줄여야 한다며 항소 의지를 비쳤다. 죄가 중해도 자식을 포기하는 어미는 없다.
다른 공판들도 연이어 방청해 보았다. 중범죄에 연루된 각기 다른 피고인들이 덤덤한 표정으로 판결문을 듣고 있었다. 잠시 후, 판사가 판결을 내리며 추후 2심 재판 날짜를 공지했다. 피고인은 보호경찰에게 인도되어 법정 밖으로 벗어났다.
변호사와 배우가 닮은 점
드라마 속 법조인 역할의 자문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소개받은 변호사와 함께 법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엄중하고도 천근만근의 무거운 공기를 느끼며, 종일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눈에 담았다.
배우와 변호사. 두 직업군을 놓고 보면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이나, 극중 인물을 마주할 때마다 의뢰인을 대하는 변호사와 닮아 있다고 여긴 적이 많았다. 둘 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변해주는 업으로 살아가기 때문 아닐까.
변호사가 수많은 의뢰인을 접하듯, 배우도 다양한 인물들을 극 속에서 만난다. 변호사는 수임을 맡는 즉시, 사건 정황부터 꼼꼼히 분석하며 무죄 입증에 필요한 단서들을 찾아 나선다. 배우 역시 맡은 역할의 처한 상황을 우선 파악한 후, 이면의 서사를 두루 살펴본다.
배우 스스로가 인물의 타당성이 충분히 쌓였다 여겨지면 그에 따른 세부적인 준비에 돌입한다. 인물과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 그에 걸맞는 말투, 분장, 의상, 소품 등 나름의 수고로운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호사 또한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추정의 원칙' 아래 의뢰인을 보호한다. 또한 상대가 단번에 무너질 허를 공략하기 위해, 수많은 변수를 논리적으로 가정해 보고 승소에 유리한 퍼즐을 조각한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승소를 위해, 배우는 역할의 소화를 위해 무엇으로 판사와 관객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핵심은 바로 진실이다. 아니,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변호사들의 공통된 답변은 "진실의 실체는 없다"였다. 의뢰인들은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다고, 때론 그들 자신도 속을 때가 있다며 기억의 조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에 서서 판사에게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최소한의 양형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배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본 속의 인물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배우 스스로가 진실의 실체를 탐색해야 한다. 그렇기에 편견없이 마음의 문을 먼저 열어야만, 온전히 그 인물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
매번 대중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바랄 수도, 재판에 승소할 수도 없다. 첩첩이 쌓여가는 고민 속에서 때론 좌절하고, 여러 한계에 부딪혀 간혹 이 일은 내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까지 밀려올 때도 있다.
변호사로서, 배우로서의 '쓰임'
그럼에도 왜 그만두지 못할까. 또다른 변호사의 말이다.
"처음 맡은 의뢰였는데, 99% 지는 확률의 소송건에서 1%의 가능성을 찾아 계속 노력했더니 결국 이겼어요. 그 성취감을 제대로 느껴봤기 때문에 이 일을 놓을 수가 없어요."
배우로서도 단 1초의 찰나일지언정, '진짜의 순간'을 만났을 때의 희열감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러나 끝도 없는 시행착오를 묵묵히 거쳐내야만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찾아오지 않던가.
부디 맡은 바 역할에 이 한 몸 잘 쓰여지길.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공감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면 변호사로서, 배우로서의 '쓰임'은 다한 것이다. 뿌듯한 보람을 안고서 다음 여정을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진심으로 임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비단 눈 앞이 아득하지만도 않다. 수없는 난관 앞에서 그들이 밟아간 길을 지표로 삼아 걷다보면, 언젠가 이 길의 끝에 올바르게 다다르지 않을까.
피고인이 방화 혐의로 판사로부터 1심 선고를 받고 있다. 방청석에 나란히 앉은 변호사와 배우가 미동없는 그의 눈을 유심히 살펴본다. 진실은 무엇인가. 아니,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 마침내 중형이 내려지고 피고인은 법정을 떠났다.
이윽고, 변호사가 자신의 의뢰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서류가방을 손에 움켜쥐며 일어났다. 배우도 법원 체험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서로 건투를 비는 인사와 함께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