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일군 임팩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가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성장이 로컬의 변화로 이어지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이야기를 특집으로 전합니다. 오는 11월 14일 개최되는 청년 소셜디자이너를 위한 무대 '2024 사회적가치 투자(Social Investor Relations, SIR) 대회'에서도 생생한 임팩트 경험담이 펼쳐집니다.[기자말] |
최재엽
㈜예그린애드 대표는 한때 독립서점을 운영했습니다. 책을 비닐백에 담아줬는데, 손님들이 자꾸만 "독립서점이 비닐백을 쓰면 되느냐"고 항의하더랍니다. 고민하던 그는 당시 겸업하던 옥외광고 업체에서 남아도는 자투리 천을 떠올렸어요. 폴리에스테르 원단으로 6~7미터짜리 현수막을 만들면, 가운데 심지부터 3미터가량의 새 천이 고스란히 남습니다. 이걸로 가방을 만들어 책을 담아주면 어떨까? 그동안 현수막을 만들며 갈고닦은 디자인‧인쇄‧재봉 실력을 총동원해 업사이클링백을 제작했고, 손님들에게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 칭찬에 고생길이 열렸습니다. 최재엽 대표가 '한번 쓰고 버려지는 옥외광고물 제조업을 친환경 산업으로 바꿔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한 겁니다. 독립서점 간판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친환경 옥외광고물 제작에 뛰어들었어요. 몇 년간 노력해서, 폐플라스틱 재생소재로 현수막을 제작하고 다 쓴 현수막을 수거해 업사이클링 제품을 생산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배너(입간판)도 탄소배출이 적은 소재로 바꾸고 그에 적합한 인쇄기도 새로 들였어요.
이런 변화를 담아 '예그린애드'라는 새 이름을 짓고, 2022년 친환경 옥외광고업체를 재창업했습니다. 출범 2년도 안 된 ㈜예그린애드가 저감한 탄소배출량은 1톤이 넘습니다. 최재엽 대표가 고인물 업계에 혁신의 새바람을 몰고온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현수막 천으로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드는 것과 소재나 공정을 환경친화적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잖아요. 어떻게 이런 도전을 결심했나요.
"독립서점 손님들을 위해 업사이클링백을 제작한 것이 첫 번째 계기였고, 그즈음 장거리 출퇴근을 하게 된 것도 한몫했어요. 쭉 광명에 살다가 사정이 있어 잠시 영종도에서 광명까지 승용차로 출퇴근을 했거든요. 출퇴근 왕복 거리가 100km나 되더라고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이들과 과학관에 자주 갔는데 환경 관련 전시물을 함께 보고 배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거든요. 앞으로 옥외광고업을 계속할 거라면,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출을 늘리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어요. 요즘은 온라인 광고가 대세라 옥외광고가 점차 줄고 특히 현수막 시장은 위축될 거라고 짐작들 하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현수막 시장규모는 연간 1800억 원 규모로 껌이나 비빔면 시장과 비슷한 수준이고 심지어 매년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요.
대기업이 전국구로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서, 지역별로 한정된 시장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소기업들이 나누어 점유하고 있어요. 신규 업체 진입도 드물어서 업체간 경쟁을 하기보다는 각자의 영업망과 고정된 파이가 있는 셈이죠. 한마디로 혁신이 일어나기 힘든 구조예요. 우리가 '친환경'으로 차별화해서 새롭게 브랜딩‧마케팅하면 회사가 미래 비전을 갖고 더 클 수 있겠구나 싶었죠."
거래명세서에 탄소저감 누적분 기록... 재구매율 높아져
- 실제로 매출이 늘었나요? 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예상했던 것보다 매출이 빨리 늘었어요(웃음). 재구매율도 높아졌고요. 현수막과 배너 같은 옥외광고물은 주로 기관이나 단체를 상대로 하는 B2B 비즈니스예요. 구매 담당자들에게 우리 현수막이 뭐가 다른지 알리는 게 중요했고 재구매를 유도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기관의 구매 담당자들은 보통 전임자가 선정한 업체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쪽을 선호하지 굳이 업체를 바꾸고 그 업체에서 두 번 세 번 구매하려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거래명세표에 이번 거래로 얼마만큼 탄소배출이 저감됐는지, 그동안 누적된 양은 얼마인지 표기했어요. 구매자가 효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재구매율이 눈에 띄게 뛰더라고요.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30~40대 여성 구매 담당자들이 저희 제품에 관심을 갖고 재구매를 많이 하시는 걸로 나타났어요.
친환경 업체로 재창업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저희가 수집하고 측정할 수 있는 데이터를 매일매일 기록하고 분석해서 마케팅과 브랜딩에 활용한다는 점인데요, 제가 전공자는 아니라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며 해나가고 있어요.
또 한 가지 생각지 못했던 변화는 직원 채용과 관련된 건데요, 광명은 청년인구가 적지 않지만 학교와 직장이 서울인 경우가 많아서 저희처럼 작은 기업들이 청년인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재창업한 후 디자이너 채용공고를 냈더니 '기업의 가치와 비전에 동의한다, 흥미를 느꼈다'면서 청년들이 지원서를 냈더라고요. 놀랍기도 하고, 뿌듯했죠. (웃음)"
- 작은 제조업체가 소재와 공정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공정은 기존과 비슷한데, 소재를 바꾸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저희 현수막은 페트병을 재활용한 재생 폴리에스테르 원단을 쓰는데요, 원단을 직접 만들 순 없고, 또 그동안 소재를 공급해주던 중간 도매상들은 이런 원단을 취급하지 않으니 직접 재생 원단을 생산하는 업체를 찾아봐야 했어요. 전국을 샅샅히 뒤져서 딱 한 곳을 찾았는데 단가가 기존의 다섯 배쯤 되는 거예요. 현수막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니고 고급 제품이 발달한 시장도 아니기 때문에 기존 제품과 가격 차이가 크면 경쟁력이 전혀 없는데, 초기엔 소량을 직구(직접구매)해야 하니까 단가를 낮출 방법이 없었어요.
1년 가까이 수시로 원단 업체에 전화해서 조건을 맞춰보고 제 나름대로 제조원가를 낮출 방법을 찾던 중에, 그 원단 업체에 계시던 분이 독립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분은 새로운 거래처가 필요하고 저는 적정한 가격의 원단이 필요했으니 서로 뜻이 통했죠. 그렇게 원단을 들여와 6개월 정도 테스트하면서 인쇄하면 색상이 잘 나오는지, 눈‧비 맞으면 어떤지, 현수막 폭이나 크기가 달라져도 괜찮은지, 밖에 오래 걸어두면 바래지 않는지 등을 알아봤죠.
배너(입간판)도 기존보다 탄소배출량을 68%가량 줄인 제품을 출시했어요. 배너는 펠트(종이) 소재에 인쇄한 다음 수성잉크가 바래지 않도록 그 위에 두꺼운 코팅지를 입히는데, 코팅 때문에 재활용이 안 되고 탄소배출량도 크죠. 저희는 잉크 내구도가 높은 인쇄기(프린터)를 구입한 다음, 펠트 소재에 코팅 없이 그냥 인쇄만 해서 제품을 만들어요.
코팅을 안 하니 종이로 분리수거가 가능하고 무게도 기존의 700~800g에서 150g으로 확 줄었죠. 잘 접히니까 종이접기 용도로 재활용하겠다고 가져가시는 분도 있어요. (웃음) 코팅 없이 나가다 보니 수성잉크가 속까지 완전히 마르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을 단축하고 정적한 제품을 뽑아내기까지 테스트를 많이 했죠."
- 현수막 업사이클링 제품 생산과 판매도 계속하시는 건가요.
"일반 폐기 현수막을 수집해서 제품을 만드는 건 아니고요, 저희가 공급한 현수막을 다 쓰시고 난 후에 간단한 기념품을 제작해서 저가에 공급해 드려요. 업사이클링 제품 생산과 판매는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원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친환경 옥외광고업체들의 연대와 혁신 꿈꿔"
- 앞으로의 계획은요. 타 지역 시장을 개척해서 성장하는 건가요.
"현수막 시장은 지역을 넘어 시장을 개척하기 어려워요. 납품하는 당일에도 내용을 고쳐 다시 인쇄한다든지 아침에 의뢰하고 오후에 받아볼 수 있냐고 묻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게 옥외광고업의 특징이자 매력이고 또 한계이기도 하죠.
옥외광고는 특정 지역 대중들에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가닿고, 한번 만들고 나면 더 이상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메일과 메시지와 같은 온라인 광고보다 일인당 탄소배출량이 더 적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요. 지역 내에서 소통하기에는 온라인보다 더 친환경적인 매체라는 얘기죠. 관련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서 옥외광고 산업 전체를 친환경적으로 바꿔낼 수 있다면 그 효과와 의미가 엄청날 거라고 생각해요.
전국적으로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아마도 대부분 저보다 어르신들일 거라고 짐작되는데요, 그분들이 저희와 같은 제품 생산방식으로 전환하시고 마케팅‧브랜딩도 함께하면서 친환경 옥외광고업자 네트워크를 만들면 어떨까 해요. 일종의 '임팩트 프랜차이즈'인 거죠. 일정한 규모가 되면 생산단가를 낮추고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동연구를 통해서 기술개발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현수막 천은 매우 균질한 소재거든요. 기술만 따라준다면, 지퍼나 단추 달린 옷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효율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페트병을 재활용한 재생 폴리에스테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천을 재생해서 다시 천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전국의 작은 옥외광고업체들이 손잡고 끊임없이 혁신하고 연대하며 지구를 지키는 날이 오길 바라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인터뷰 진행 및 작성은 이미경 희망제작소 연구위원이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