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던 장소가 있었다. 바로 부평 지하호. 이곳의 정식 명칭은 '인천육군조병창 지하시설'이다. 부평지하호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중일 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 일대에 만들려고 했던 거대한 병기 생산, 보급 기지 건설의 흔적들이다.
그들은 부평구 산곡동에 있는 함봉산 자락 이곳저곳에 인공동굴을 만들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눈을 피해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병참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병참기지, 군비 생산 기지라는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자 나라 잃은 시간을 증언해 주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지근거리에 있었다니. 부평지하호는 심지어 필자가 한때 근무했던 학교와 불과 버스 한두 정거장 거리에 있었는데, 왜 그동안 몰랐을까?
지난 26일, 함께 근무하는 사회선생님을 따라 이십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부평지하호 탐방에 참가하면서 느낀 감정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참혹했던 강제 동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부평지하호 달빛 기행_2024 기억하라 부평지하호'는 부평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의 지하공장인 부평지하호를 직접 걸으며 '아시아 태평양 전쟁유적'을 체험해 보는 것이다.
탐방은 한 달 한 번 진행되는데, 산곡동 인평고등학교 인근 구세군 어린이집 앞 공터에서 시작한다. 함봉산 산길을 따라 걸으며 부평 지하호의 흔적들을 답사하게 되며, c구역 6번 지하호 내부를 탐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 탐방 시간은 대략 한 시간 30분 정도다. 사유지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방문이 어렵고 부평문화원의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방문할 수 있다. 전체 탐방은 부평문화원 문화 해설사님의 안내로 진행된다.
전쟁과 강제 동원의 흔적
부평 지하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리플릿 안내 글에 따르면, 지하호는 조사를 할 당시인 2016년만 해도 '새우젓 굴'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다만 몇몇 동네 어르신들의 기억에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언이 있었고, 이후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 역사 전문가들과 교류를 통해 일본군 극비 문서를 발견하게 되어 인천 육군 조병창의 지하공장(무기 생산 및 보관)'으로 확인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현지, 아시아 곳곳에 부평지하호와 유사한 구조물을 건설하였다. 이중 부평에 건설된 것은 지금까지 총 29개 정도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부평 지하호가 조병창을 건설하기 위한 굴이라는 사료를 확인한 후 일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지하호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하게 되면서 강제동원의 전모가 하나 둘 알려지기 시작했다.
증언에 의하면 부평 인근뿐 아니라 멀리 경기도 등지에서도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물론 자신이 어디로, 왜 가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1일 2교대, 매일 12시간씩 돌산을 파는 강제 노동을 했다. 그들은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을 맞이했던 1945년 8월 15일 당일에도 돌산을 파고 있었으며, 교대 인원이 오지 않아 굴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해방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곳에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조병창)을 만들어 중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병기 보급 문제를 하고자 했다. 다만 조병창을 완성하기 전에 일본이 패망하여 그 전모가 알려지기도 전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의 흔적이 쌓이고 있는 부평 지하호
부평지하호가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부는 일본군 주둔지에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고 돌아간 후 주둔지는 미군기지나 군부대가 되어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지하호는 사유지에 있다 보니 오랜 시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사가 쏟아져 자연스럽게 입구가 막힌 곳도 생겨났다. 경기도 광명시의 광명동굴이 그러했듯 한때 새우젓 저장 창고로 쓰이기도 했단다. 우리가 탐방한 c구역 6번 굴 역시 새우젓을 포장했던 비닐 등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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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지하호 탐방 c구역 6번 지하호 탐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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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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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탐방이 가능한 c구역 6번 지하호의 깊이는 약 150m 정도다. 산길도 어두웠지만 지하호 내부에는 조명장치가 없기 때문에 탐방에 손전등은 필수다. 손전등이 없다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암흑이 우릴 기다린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학생들이 돌벽을 뚫고 돌을 나르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안전을 위한 안전모 착용 역시 필수다. 입구에서 나눠준 안전모를 착용하고 랜턴으로 발끝을 비추면서 지하호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로 질척거리는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동굴 끝에 도착하면 어린 학생들이 작은 손으로 힘겹게 뚫었을 단단한 돌 벽을 흔적이 우리를 기다린다. 탐방객들은 잠시 모든 불빛을 끄고, 일제 강점기 또래 학생들이 마주했을 칠흑 같은 어둠 속 그 시간으로 돌아가 묵념을 올렸다.
어느덧 지하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옷을 뚫고 피부에 전해진다. 동굴 벽면에는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돌에 석회석 성분이 섞여 있었을까? 방울방울 물기가 맺혀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니 손톱만 한 종유석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 지하호에도 어느덧 시간의 흔적이 쌓이고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돌아가는 길, 먼저 출발한 학생들의 랜턴이 멀리 동그랗게 빛의 원을 그리면서 산 아래로 움직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저 잠시 머물다 왔을 뿐인데, 해방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호흡하고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움직이고, 꿈꿀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역사의 흔적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은폐하고,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에조차 가물거릴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그 흔적은 어디에선가 불쑥 우리를 찾아온다. 광복 후 수십 년이 지난 2016년에 부평지하호가 불쑥 우리를 찾아왔듯이 말이다.
부평지하호는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의 가슴 아픈 현장이면서 반전 평화 교육의 생생한 현장일 수도 있다. 최근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망동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들에게 이곳 부평 지하호를 보여주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진다.
* 부평지하호와 달빛 기행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부평문화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평지하호 (gcamvr.synology.me)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