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이 되면 슬슬 긴장된다. 처가와 본가 양쪽 집안에서 김장 날짜를 통보하기 때문이다. 특히 처가는 다섯 가정이 뭉쳐서 김장을 담근다. 이런 대역사가 없다. 사위가 된 첫 해,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배추가 성처럼 쌓여 있었다.
김칫소를 아무리 발라도 배추의 수는 줄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는 배추의 벽. 죽을 게 빤한데도 성벽에 올라타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날 도합 배추 250포기를 담갔다(총각김치는 뺀 수치다). 일주일 내내 팔꿈치가 시큰했다. 관절에 새겨진 기억 탓일까. 이맘때면 마트의 알배기만 봐도 등골이 쭈뼛하다. 그러던 중 날아온 소식.
"엄마가 그러는데, 올해 더워서 그런가? 배추가 다 안 자랐대. 이 상태면 12월 첫째 주에나 김장 할 거 같다던데?"
늦어진 경기도의 김장, 이러다 새해에 겉절이 먹을 판
참고로 처가는 배추를 직접 기른다. 보통 김장에 쓰는 배추는 9월 하순에 파종해 11월에 수확한다. 배추는 '고랭지'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너무 더우면 자라지 못 하는 작물이다. 근데 9월 내내 폭염에 폭우가 기승이었으니 배추 싹이 제대로 자랄 리 없었다.
이제는 배추가 비싼 게 문제가 아니다. 배추가 멀쩡히 자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수확하는 배추의 크기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그간 200포기를 넘게 담갔다는데, 작년에는 고작 80포기만 담갔다. 본가도 50포기만 담그고 말았다. 그마저도 시들시들해서 꺼내 먹는 족족 찌개에 넣었다.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도 올해 김장 시기를 보름 정도 늦추는 게 좋다고 이야기하더라. 중부지방에서 12월에 김장이라니. 이제는 새해에도 김장김치를 겉절이로 먹을 판이다. 본가도 언제 김장할 지 통 소식이 없다. 이러다 조만간 새해 행사로 김장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김장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애초에 김장은 겨우내 먹기 힘든 채소를 저장하기 위해 고안된 조리법이다. 근데 김장일이 늦춰지면 고작 두세 달 먹을 김치를 위해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잖은가.
날씨와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새삼스럽지만 기후와 음식은 매우 밀접하다. 이는 조리법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더운 지방에서는 음식이 맵고 짠 반면, 추운 지방의 음식은 비교적 심심한 경우가 많다. 이는 기후에 따른 식품 보관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더불어 기후는 사용 가능한 식재료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로마가 전성기를 맞았던 1세기 무렵은 '로마 온난기'라고 부를 만큼 날씨가 따뜻했다. 그 덕에 지중해 연안의 평야지대에서 밀농사를 짓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 실제로 이 시기 로마 시민들은 유래 없이 밀가루 빵을 많이 먹었다.
건국 초기 그들의 주식이 귀리죽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변화였다. 빵이 시민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로마 도심에는 대형 방앗간과 빵 공장이 수십 곳 들어서기 시작했다. 피스토르(Pistor)라고 부르는 제빵사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직으로 자리 잡았다.
올리브 역시 넘칠 만큼 많아졌다. 검투사 경기가 있는 날, 장사꾼들이 콜로세움 앞에서 올리브기름에 튀긴 멸치(앤초비)를 스낵처럼 팔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여기에 당시 로마 시민들이 로메인 상추를 일상적으로 즐겨 먹었음을 비춰볼 때, 신선한 잎채소의 공급도 원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풍성한 식재료는 로마 미식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었다. 로마의 미식가 마르쿠스 가비우스 아피키우스가 쓴 요리책 <데 레 코퀴나리아>에는 현재의 프렌치토스트, 오믈렛, 라자냐, 에스카르고(달팽이 요리)의 뿌리로 추정되는 조리법들이 남겨져 있다.
반면 소빙하기가 닥친 14세기 유럽은 본격 '맛없는 맛'의 시대를 맞았다. 추위로 농업생산량이 급감한 탓이다. 유럽인들은 싱싱한 잎채소 대신 오래 저장할 수 있는 뿌리채소를 키워 먹었다. 푹신한 밀가루 빵 대신 거친 호밀빵이 식탁에 올랐다. 독일식 양배추 김치 '사우어크라우트'가 본격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올리브 생산량이 줄어든 빈자리를 동물의 비계와 버터가 대신했다. 사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추위가 목축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유럽의 농노들은 신선한 우유조차 귀해 치즈를 만들고 남은 유청을 마셨다. 그들은 한평생 퍼석한 빵에 햄과 소시지, 염장 청어와 장기간 숙성한 치즈를 먹으며 살았다.
기후위기는 곧 '음식문화의 위기'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후위기는 우리의 식탁을 어떻게 바꿀까? 김장을 앞두고 뉴스로 전해 듣는 소식들은 죄다 우울하기 짝이 없다. 올해 강원도의 송이버섯 수확량은 도매시장에서 경매가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단다.
더위에 지친 동해 오징어는 아예 북극까지 도망쳐버렸다. 유래 없는 고수온 탓에 경남 굴 양식장의 약 30%가 폐사 피해를 봤다. 이맘때 동네 횟집 수조에 가득 찼던 전어가 올해는 눈 씻고 봐도 없다.
뜨거워진 바닷물에 질려버린 해물들처럼 김장도 점점 우리의 달력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1월 김장, 2월 김장 얘기가 나오다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건 아니려나.
어쩌면 그 자리를 파파야 김치와 망고스틴 김치(이미 모 기업에서 출시했더라)가 대신할지도 모르겠다. 사 먹는 음식들마다 죄다 달고 짠 것도 이제는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시원한 맛의 물김치를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탄소중립'이니 '생물 다양성'이니 하는 거대 담론이 아직 나로서는 잘 와 닿지 않지만, 이제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기후위기란 곧 '음식문화의 위기' 역시 의미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