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살이 10년을 넘기는 올봄 출판사를 창업했다. 때는 2024년 3월 7일. 작은 산골짜기에 둥지를 튼 뒤로 밭을 일구며 땅과 더불어 사는 행복을 누렸지만 생업은 언제나 책과 연결됐다. 서울 살 때 경력을 살려 귀촌 첫해부터 편집 프리랜서로 일해 왔고, 옆지기 또한 재택 출판 기획자로서 농사와 밥벌이를 병행했다.
끊임없이 산골을 찾아 준 도시의 인연들, 글과 이어진 작업들 덕분에 세상과의 소통을 놓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자꾸 허전했다. 이 자리를 지키면서도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었다.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출판사 창업으로 산골부부의 인생 3막은 그렇게 열리게 되었다.
'스스로 빛나는 별처럼' 작은 것의 큰 가치를 담고 싶은 마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그 가운데서도 겨울밤 황소자리 별자리 위에 꽃다발처럼 반짝이는 플레이아데스성단. 잔잔하게 빛나는 이 별무리들이 좋았다. 산골 별바라기 시간들이 시나브로 쌓이면서 출판사 이름도 자연스레 도서출판 플레이아데스가 되었다. '스스로 빛나는 별처럼' 작은 것의 큰 가치를 담겠노라는 마음을 고이 담아서.
비가 살살 나리던 지난봄, 해밀톤 호텔 옆 골목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너무나 평평한 그 길 위에서 문득 떠오른 것. 용산에서 첫 직장을 다녔고, 녹사평역에서 혼인식을 치렀으며, 원효로에 신혼살림을 꾸렸던 내 삶의 이력들. 산골에 산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이태원 참사를 미디어로만 접하던 시절엔 왜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을까. 나도 이 아픈 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심경을 부여안고 해방촌에 자리한 '공동체미디어 용산FM' 사무실로 향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황혜원 용산FM 대표를 만나 미리 언약한 대로 출판 계약서에 사인을 주고받던 순간. 둘 다 이름이 '혜원'이라서 책도 잘될 것 같다며 함께 나눈 웃음 속에 참사 골목에서 피어난 복잡한 감정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도서출판 플레이아데스의 첫 번째 책 <이태원으로 연결합니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태원을 살아갈 사람들의 목소리
마을방송국 용산FM은 이태원 참사를 지역의 아픔으로 끌어안고 또 극복해 보고자 여러 활동을 꾸려 왔다. 그 가운데 '이태원 기록단' 프로젝트가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그날 이후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그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 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
퇴직 교사부터 기록 활동가, 스타트업 대표, 사진작가, 대학원생, 디자이너, 다큐멘터리 감독까지…. 일곱 명의 기록단이 주민이자 상인이며, 이태원에서 일하는 노동자이자 이태원을 즐겨 방문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낸 이야기는 2023년 가을부터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다.
처음엔 잘 믿기지 않았다. 이토록 거대한 슬픔을 이다지도 따뜻하고 단단하게 품고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이. 인터넷 화면에 새겨진 그 글자들을 꼭 종이 위로 옮기고만 싶었다.
온라인에 띄워졌던 글은 한층 깊이 있는 내용으로 보완되었고, 인터뷰이들의 최근 모습들도 개성 있고 선명한 사진으로 추가되었다. 본격으로 편집에 들어가면서 가장 고심했던 것은 어쩌면 단 하나. 연이은 사회적 참사들로 애간장이 닳았을 재난 시민들이 이태원 참사 그 곁으로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절망 넘치는 이 세상을 계속 믿고 사랑하고픈 마음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길에 이 책이 징검다리가 되는 것.
조금 캐주얼하게 "이태원으로 연결합니다"
이태원 그 떠들썩한 복판에 살고 있는 주민, 매년 가족 단위로 핼러윈을 즐기던 부부, 라운지 바를 운영하는 상인, 클럽 DJ, 퀴어 아티스트, 모로코에서 온 이주민 그리고 이태원을 애정하는 방문객까지.
모두 아홉 명 인터뷰이와 공명한 일곱 명의 기록단 그리고 재난 세대를 대표하는 한 청년의 간절한 독백은, 저마다 간직한 그 애틋함으로 내 안에 흐르던 슬픔을 멎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태원이 좋아서 이태원에 스며든, 이태원을 살아갈 사람들의 목소리는 참사로 희생된 159명의 별들에게도 분명 닿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소망이 피어났다.
늑장 출범한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참사 2주기를 보름여 앞두고서야, 참사 관련 기록물에 대해 폐기 금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정부 기관에 발송했다. 용산구청장 무죄 1심 선고에서 보듯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까지 안전사회로 가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인다.
그럼에도 희망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애도와 연대(연결)의 물결일 것이다. <이태원으로 연결합니다>를 통해 참사 희생자, 생존자, 유가족 그리고 시민을 위한 연대의 손길, 무지갯빛 사랑이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작은책> 11월 호에 함께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