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서 투표소의 모습. 미 육군 소장자료.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서 투표소의 모습. 미 육군 소장자료. ⓒ 미 육군=미 의회도서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 요인들만이라도 똘똘뭉쳐 시국에 대처했다면 어땠을까, 후인의 부질없는 상상이다.

분단정권에는 결단코 참여를 거부한 남북협상파, 일단 단선 정부에 참여했다가 힘을 키우고 기회를 살펴 통일정부를 이루자는 현실파로 크게 갈렸다.

유림은 남한만의 단선에는 단연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독립노농당을 창당한 것은 그가 오랜 세월 연마해온 아나키즘을 통해 새나라를 세워보자는 이상의 현실화였다.

1947년 5월 5일 서울 역경원에서 독립노농당 제1차 전당대회를 열었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다시 신임을 받았다. 일왕 부자를 처단하고자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치고 22년 동안 옥고를 치룬 아나키스트 박열과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을 이끌었던 이을규가 부위원장, 역시 아나키즘 활동가 원심창이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날 전당대회는 3개 결의문을 채택했다.

1. 미군정의 보통선거나 남조선 단독정부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1.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논의하는 한 이에 참가하지 않는다.
1. 모든 독립운동 역량을 국민의회에 집중하여 기존 임시정부를 개편강화하여 연합국의 승인을 요구한다.

1947년에 이르러 남한 사회는 격동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사실상 결렬(5월 21일), 여운형 암살(7월 19일), 미소공동위원회의 미 대표, 소련제의 거부(8월 7일), 이청천 대동청년단 결성(9월 21일), 장덕수 암살(12월 2일), 김구, 남한단정수립 반대성명발표(12월 22일).

1948년에 접어들어 격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입국(1월 7일), 단정 반대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거부하는 총파업(2월 7일), 김구 단정수립에 반대하여 <3천만 동포에 읍고함>성명(2월 10일), 김구·김규식, 북에 남북협상론 제의, 제주에서 분단정부 반대항쟁(4월 3일), 김구·김규식 남북회담을 위해 방북(4월 19일)이 이루어지고, 이승만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 세력의 주도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고 있던 1948년 3월 15일 유림은 이를 반대하는 단호한 성명을 언론에 밝혔다. 성명의 주요 내용이다.

남조선 단독선거는 다음과 같은 각 항목의 결함이 있으므로 나와 행동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이를 반대한다.

1. 선거법의 제정과 선거 사무집행이 자주적으로 되지 못했다.
1. 조선 전래의 국토를 양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조선에서도 대다수 국민이 반대한다.
1. 극소수 특권층이 지배하는 결과가 되므로 근로대중의 복리를 보장할 가능성이 없다.
1. 질적·양적으로 통일정부가 되지 못한다.
1. 자주독립을 무기한 지연시키고 국토분단을 무제한 만성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1. 골육상쟁 비극을 연출할 가능성이 짙다.
1. 미·소 대립을 조장하여 국제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주석 1)

정세가 분단정부 수립 쪽으로 굳혀져가면서 이를 막고자 하는 운동이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3월 12일 김구·김규식·조소앙·김창숙·조완구· 홍명희·조성환 등 7인의 연서로 5.10 선거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유림을 비롯하여 엄항섭·여운형·홍명희· 김붕준 등 독립운동가 출신들은 4월 15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발족하고 유림을 대표 간사로 선출, 즉각 행동에 나섰다. 성명서의 주요 대목이다.

향자(向者)에 민족진영의 지도자 7인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단선 반대의 기치를 분명히 세웠으나 분산된 세력을 집결할 기구가 있어야 투쟁이 커질 것이다. 이 기구를 갖추려는 초보공작으로 우리는 통일 독립운동자협의회를 발기하였다. 동지여 함께 집결하여 함께 투쟁하자. 개인의 이해화복으로 민족의 운명을 그르치려는 모든 책략을 분쇄하고 평화의 길로 전진하자. (주석 2)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는 발족대회에서 강령으로 3개항을 채택하였다.

1. 통일독립운동자의 총 역량을 집결한다.
1.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도모한다.
1. 민족강토의 실체 분열공작을 방지한다.

유림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모아 분단정권 수립을 반대했지만, 미국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단정수립 측의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구는 최후 수단으로 방북의 길에 나섰고, 유림은 옷깃을 붙잡고 이를 만류하였다.

주석
1> <대동신문>, 1948년 3월 16일.
2> 송남헌, <해방3년사> 제2권, 54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유림평전#유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주요시국현안에 성명 낸 유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