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거나 새로 구획된 공간이 아닌, 오래부터 있어 온 생활의 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남은 서울의 '동네'에 들어섰다. 오래되고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갤러리, '공간 루트'.
시장과 커피숍, 음식점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일상적인 동네에 위치한 이 갤러리는 그림을 감상하고 사는 것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말해주고 있었다.
장영은 작가의 개인전 <빛, 숨, 결>(10.19~11.8, 월요일은 휴관)을 보기 위해, 연신내에 위치한 공간 루트에 다녀왔다.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감각들을 영롱하게 되살려주는 작품들이 있다. 장영은 작가는 깊이 있게, 때로는 관조하고, 때로는 주의 깊게 우리 주변의 자연을 예민한 감각으로 담아내 왔다.
작가가 담아내는 자연은 우리에게서 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지만 눈길을 주지 않는 일상적이고도, 도심 속에서 여리게 솟은 자연들이다.
버드나무, 나무의 나이테, 거미줄에 맺힌 이슬, 나뭇잎, 물 웅덩이 등,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고 일상적인 아름다운 것들에 작가의 시선이 머문다. 작품을 들여다보며 관람자도 작가의 시선에 동화되어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완성된 자연의 부분을 들여다본다. 그저 존재하는 자연의 조각들을 그저 바라보는 행위는 어느새 명상이 된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는 작품의 작법은 독특하다. 한국미술을 전공한 작가는 푸른 수묵을 주로 사용하며, 은사 실로 바느질하여 수묵회화의 평면적 특성에 운율감을 부여한다. 물감을 덧입혀 수정할 수 있는 유화와 달리 수묵은 수정이 불가하다. 한 번의 붓질은 투명하고 명료하게 작가의 정신세계를 오롯이 보여주기에 고도의 집중과 수련이 불가피하다.
작가는 전통적인 한국화를 구현하면서도, 푸른 수묵을 사용함으로써 그가 재현하고자 하는 투명하고 맑은 자연을 현대적으로 재현한다. 또한 수묵화 위에 작가의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은사실은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수묵화에 입체감과 빛을 더한다. 수 놓인 은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수묵이 광목천에 스민 것처럼 작고 일상적인 자연의 조각에 천천히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거미줄에 맺힌 이슬을 표현한 <삶의 조각 33-1>과 가변 설치 작업이 특히 눈에 띈다. 설치 작업에서는 나뭇가지와 실과 구슬을 꿰어 거미줄을 표현했다. 작가는 "은빛 실로 시간을 엮는 행위는 내면을 지키는 명상이자, 안전줄 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명상적이고 자기 수행적인 작업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의 디테일을 따라가다 보면, 디지털 세계가 점유해 버린 우리의 눈과 귀, 손의 감각이 깨어난다. 그렇게 무뎌진 감각이 깨어나면, 작가가 시선처럼 섬세하게 거미줄에 맺힌 때 묻지 않은 영롱한 작은 이슬을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