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공동과제인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 앞에 민의 주체역량으로 새로운 생태계 이루고자 2023년 살림학연구소가 태어났다. 그 길에 동참하는 개인과 단체가 모여 지난 10월 3~6일 '살림학연구소 첫돌맞이 한마당잔치'를 열었다. 그 자세한 이야기를 살림꾼 주제발표, 강연 등으로 나눠 연재한다.네 번째는 살림꾼(연구원) 주제발표 '마을창업'이다. 생태건축 '흙손' 안섭 살림꾼, 마을떡집 '덩기덕쿵떡' 아름 살림꾼, 마을장터 '해뜨락' 재우 살림꾼, 예술공방 '그리는사이' 지영 살림꾼, 공유사무실 '꿈꾸는 일터'·법률사무소 '명동' 하룡 살림꾼, 법률사무소 '해원' 아름 살림꾼이 함께 했다.[기자말] |
각자도생 사회에서 서로 살림의 지혜로
언젠가부터 각자도생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치솟는 물가, 최악의 가계부채 등 불안한 경제지표는 심심치 않게 인터넷 포털 대문을 장식하지만 그 불안을 잠재울 사회안전망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이제 누구도 삶을 책임져 줄 수 없으니 홀로 살아갈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혹자는 말하지만, 그런 게 쉽다면 왜 여전히 삶은 팍팍할까? 과연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지난 10월 초, 각자도생 사회에서 서로 살리는 상생의 경제를 구현한 창업체가 모여 서로 살림의 지혜를 나눴다. 살림학연구소 첫돌잔치 '마을살이 토대로 창업하기' 살림꾼 주제발표에서였다. 이날 발표에는 밝은누리 강원 홍천마을과 서울 인수마을에서 마을 공동체를 토대로 다양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살림꾼들이 모여 마을 관계망에 기초한 창업의 계기와 과정, 서로 살리는 경제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을창업은 마을과 창업주체가 만나는 생명사건
마을에서 사업체가 생겨나는 원리는 간단하다. 살다 보면 갖가지 필요가 생겨나고, 그 필요에 공감한 창업주체가 생겨나 서로 만난다. 흔히 시장경제에서도 상식으로 여겨지는 원리지만 마을 공동체를 토대로 창업한다는 건, 이를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필요가 생겼다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필요에 공감하고 준비된 창업주체가 세워져야 한다. 마을살이를 기반으로 한 마을창업은 주체가 마을 관계망에 기반해 꿈을 품고, 준비 과정을 거친다. 뜻을 품고,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추진 과정을 함께하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안정적인 토대 위에 새로운 시도를 하며 실력을 닦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창업주체가 새로워지고, 새로운 창업체를 계기로 마을도 새로워지기에 마을창업은 하나의 생명사건이라 할 수 있다.
생태건축 '흙손'(강원 홍천마을)은 마을 공동체가 귀촌하며 시작했다. 생명을 살리고 자연과 호흡하는 건축에 뜻 품은 이들이 먼저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배웠고, 공동체에 필요한 여러 건축물을 짓고 수리하면서 다양한 생태건축 공법을 연구하고 시도했다. 실제 집을 짓는 과정엔 공동체 구성원들의 물적 지원과 울력 등의 참여가 있었다. 경험들이 하나둘씩 쌓여 창업에 이르렀고, 지금은 마을에 필요한 건물뿐만 아니라, 생태건축이 필요한 여러 현장을 찾아가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짓는다.
마을떡집 '덩기덕쿵떡'(강원 홍천마을)은 한 마을 이웃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새로운 꿈을 찾던 아름 살림꾼에게 떡 만들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직접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름 살림꾼은 평소 마을에서 여러 잔치떡 나눌 일도 있고, 워낙 좋아하던 차에 가까이에서 건강한 떡을 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새로운 꿈을 품었다. 떡 제조기술을 익히는 데에는 이웃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개월 동안 떡을 만들어 이웃에게 나누고, 의견을 받아 고쳐 가며 제조법을 완성해 창업했다. 창업계기부터 준비과정 모두 혼자가 아닌 마을과 함께한 것이다.
마을장터 '해뜨락'(강원 홍천마을)은 친환경 유기농 식료품을 파는 매장이다. 평소 몸을 돌보면서, 또 마을학교 교사로 지내며 건강한 먹을거리에 필요를 느낀 재우 살림꾼이 장터를 꾸려 간다. 재우 살림꾼은 몸에도, 지구에도 좋은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장터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창업을 준비했다. 특히 마을밥상과 같이 공간을 얻어 동시에 창업했는데, 밥상은 필요한 식재료를 마을장터에서 얻을 수 있고, 마을장터는 고정적인 공급처를 찾을 수 있어 서로 선순환을 이룰 수 있었다.
예술공방 '그리는 사이'(강원 홍천마을) 공방지기인 지영 살림꾼은 오랜 기간 마을학교에서 미술수업으로 학생들을 만나 가르쳤는데, 이때의 경험이 공방을 열 수 있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에서 종종 열리는 크고 작은 잔치와 행사에서 멋지음(디자인)을 맡아 쌓은 경험 또한 든든한 바탕이 됐다.
'꿈꾸는 일터'(서울 인수마을)는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일하는 공유 사무실이다. 하룡 살림꾼은 오래전 한 마을 이웃이 '언젠가 마을에서 함께 모여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좋겠다'고 나누었던 꿈을 기억했다가, 코로나19를 거치며 재택근무가 늘어나는 흐름에 창업을 했다. 하룡 살림꾼은 공유사무실 옆에 법률사무소 '명동'(서울 인수마을)도 창업했는데, 마을에서 살다 보면 꼭 소송이 아니라도 법률 지식이 필요한 때가 있고, 시민단체 활동가로 지역에서 여러 주민과 활동하면서 필요성에 공감해 사무소를 열었다. 이웃의 꿈이 창업체로 이어지기도 하고, 마을살이를 통해 새롭게 얻은 꿈이 발걸음으로 이어진 사례다.
법률사무소 '해원'은 강원 홍천마을에 자리한 법률사무소다. 법률사무소가 보통 수도권에, 그것도 법원과 검찰청 근처에 몰려 있는 데 반해 '해원'은 면에 위치해 있다. 사무소를 연 아름 살림꾼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자리한 것이다. 흔히 업계에서 하는 일반적인 결정이 아니기에 용기가 필요했는데, 아름 살림꾼은 마을 공동체로 살기에 자연스럽게 귀촌해 창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창업이 주는 힘
마을 공동체를 토대로 창업한다는 건, 마을 사람들이 잠재적인 손님이 된다는 점에서 사업 규모를 예측할 수 있고, 재정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에 위험부담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재우 살림꾼은 "마을을 토대로 창업하는 진짜 유익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라고 한다. "함께 공유하는 가치와 삶에 녹아든 문화가 있고, 같은 길 가는 길벗이라는 신뢰관계가 주는 힘이 크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창업체들은 시작할 때 필요한 씨앗기금을 모으기도 하고, 공간을 얻어 고치고 꾸미는 과정에 마을 이웃들이 울력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다. 초기자금을 마련하고 과도한 인테리어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살림꾼들은 함께하는 과정 자체가 주는 힘이 크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힘은 단지 창업과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운영과정에서도 이어진다. 때마다 창업체의 사정을 살피고 물어 주는 이웃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큰 힘이다.
새로운 문화와 생명살림의 가치를 구현하는 현장
마을창업은 마을 관계망에 토대했기에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시장경제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도 하고, 줏대 있게 생명살림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장이 된다.
마을장터 '해뜨락'에서는 두부를 살 때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저마다 통을 가져와 담아 간다. 세제도 마찬가지다. 다시 되살려 쓸 수 있는 보냉제, 뽁뽁이 등의 포장재는 다시 생산자에게 보내어 재사용한다. 모양 때문에 유통과정에서 저품질 취급을 받는 물품을 구분하지 않고 사고판다. 장터지기뿐만 아니라 이웃들 모두 자기 이익만 구하지 않고 지구살림을 위한 문화를 일상에서 함께 만들어 간다.
예술공방 '그리는 사이'는 디자인업계에 만연한 문화에 문제의식을 느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창작의 자유가 무시되는 갑을관계를 넘어서 서로 주체적으로 소통하며, 단가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결과물을 위해 수정 건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우리 삶과 동떨어진 그림을 창작물에 담지 않으려 하고, 유행이나 수익성에 따른 멋지음이 아닌 생명살림의 가치를 담고자 노력한다. 지영 살림꾼은 "줏대 있는 공방이 되는 자유"가 바로 "마을이 준 선물"이라고 고백한다.
생태건축 '흙손'은 건축현장에 만연한 거칠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한다. 일을 하다가 서로 어긋날 때, 수직적인 관계나 목소리 큰 사람의 힘으로 정리하지 않고 서로 대화하며 갈등을 조율한다. 또 집을 지으며 대충 작업하거나, 폐기물 등 쓰레기를 벽이나 바닥에 묻지 않는다. 일하며 품는 마음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근성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문화를 만든다.
'꿈꾸는 일터'는 호혜의 경제를 실천하는 장이기도 하다. 보통 공유 사무실은 시설 여건과 제공서비스에 따라 비용이 책정되는데, '꿈꾸는 일터'는 각자의 필요와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비용을 책정하고 책임 있게 사용한다. 또 공간만 공유하지 않고, 같이 청소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형편과 일상을 살피며 돕는 문화를 지어 간다.
서로 돕는 살림경제를 실현하는 마을 관계망
마을살이를 토대로 세워진 창업체들은 서로 돕고 순환하는 경제를 함께 만들어 간다. 공간을 짓고 수리할 때 '흙손'이 나서고, 공간을 꾸밀 때 '그리는 사이'의 도움을 받고, 창업체 여는 잔치를 할 때면 '해뜨락', '덩기덕쿵떡'이 함께한다. 일하면서 겪는 여러 법률 등의 문제는 '해원', '명동'이 돕는다. 마을창업체는 서로 이어진 마을 관계망을 토대로 생성됐기에, 창업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서로 돕는 순환의 관계망으로 거듭난다.
창업주체가 겪은 일들은 지혜와 슬기로 축적되어 새로운 창업체로 뻗어 나가기도 한다. 여러 이웃들이 경험을 쌓아 새로운 발걸음을 도모할 수 있는 현장이 되고, 창업체가 겪은 시행착오는 새로운 시도의 발판이 된다. 실제 밝은누리 사례에 따르면 마을밥상과 마을학교, 마을찻집, 먹거리장터 등 새로운 창업체가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날 주제발표 시간에는 다른 마을에서 창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길벗들이 함께하기도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다양한 이들이 사업체를 운영하며 겪고 있는 어려움과 궁금증을 나누며 함께 길을 모색했다. 주제발표 시간 후에도 살림꾼들과 길벗들은 곳곳에 모여 밥상을 나누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살림경제의 실천은, 마을과 마을을 넘어 서로 같은 뜻을 품은 이들과도 이어 주는 힘을 가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살림학연구소 누리집(www.saallimgil.org)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