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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쯤 걸리는데 퇴근길에 운동 삼아 종종 걸어서 가곤 한다. 다른 직장에 비해서 퇴근 시간이 일러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적당히 땀을 내며 걸으면 기분이 상쾌하고 좋다.

며칠 전에도 걷기에 딱 좋은 날씨라서 퇴근 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단감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똑같은 봉지를 들고 온다는 건 분명히 근처에 단감을 싸게 파는 곳이 있다는 표시였다.

10개에 오천원 단감, 싸서 사긴 했는데

 간판도 없는 가게에 싼 과일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간판도 없는 가게에 싼 과일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 심정화

역시나 얼마 안 가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한 가게가 보였다. 변변한 간판도 없이 현수막을 걸어 놓은 가게에는 단감은 물론이고 각종 과일부터 채소, 두부와 건어물까지 먹거리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득한 물건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 가게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단감 10개 오천원, 귤 1상자 만원, 오이 2개 천원.

정신없이 물건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오천원으로 과일을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던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바구니에 단감을 골라 담기 시작했다. 이어서 오이와 새송이 버섯도 한 봉지 샀다. 이것저것 더 많이 사고 싶었지만 집까지 들고 가기에 무거울 것 같아 참았다.

물건 값 7000원을 내고 가게를 나서는데 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기분이 좋았다. 요즘은 마트에서 몇 만 원어치 장을 봐도 딱히 손에 들리는 게 없는데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푸짐하게 장을 본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런데 뿌듯한 마음도 잠시,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고 집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너무 초입에서 산 거라서 그 무거운 봉지를 들고 한참을 걸어가려니 힘이 들었다. 단감을 크고 좋은 것으로 골라 담을 때는 신나고 좋았는데 단감 10개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비닐봉지의 손잡이는 무게를 지탱하느라 팽팽하게 당겨져서 손가락 마디가 짓눌려 아팠다. 혹시라도 비닐이 무게를 못 견디고 터질까 봐 집에 오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한쪽 어깨에 멘 가방은 자꾸만 흘러내리고 다른 손에 든 비닐봉지는 무겁고, 집에 오는 길이 고역이었다.

 7000원어치 물건을 담은 비닐봉지가 묵직해서 뿌듯했다.
7000원어치 물건을 담은 비닐봉지가 묵직해서 뿌듯했다. ⓒ 심정화

이쪽저쪽으로 손을 바꿔가며 겨우 들고 와서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식탁 위에 비닐봉지를 내동댕이쳤다. 짜증이 났다. 싸면 얼마나 싸다고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점점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탓하게 되고, 궁상맞은 내 신세를 한탄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버섯을 볶고 오이를 무쳐 저녁을 먹고 나서 단감을 깎았다. 남편에게 내가 얼마나 고생스럽게 단감을 사들고 왔는지 엄살을 보태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내 말을 듣는 남편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내 수고를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남편은 마치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어서 약이 올랐다.

국민 약올리는 뉴스에 화가 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약이 올랐던 건 마침 거실 TV에서 들려오는 뉴스였다. 누가 공천개입을 했네 안 했네 하는 문제로 국회의원들이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국민들은 살림살이가 빡빡해서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아다니는데, 정치인들이 어떻게 하면 높은 과일값을 낮춰 국민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뿐인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명품백을 누가 받았네 안 받았네 하고 날마다 시끄럽게 떠들지를 않았나. 또 누가 주가를 조작해서 엄청난 이득을 취했네 아니네 하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나 말이다. 계속해서 그런 뉴스가 들려오니 이제는 지칠 지경이다.

물론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천개입이나 대가성 있는 명품백 수수, 주가조작에 대한 진위 여부가 궁금하기는 하다. 공정하고 제대로 된 조사로 진실을 밝혀내고 잘못한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나에게는 10개에 오천원 하는 단감만큼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가계부를 적으며 한숨 짓는 수많은 주부들과 언제 정리해고 될지 불안해 하는 수많은 가장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알바로 겨우 버티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에게는 당장 형편이 조금 나아지게 만들어 주는 정책이 훨씬 더 반갑고 기다려질 것이다.

언젠가 사극에서 가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을 보며 임금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마저도 본인의 탓으로 자책하던 임금을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에 더 한숨이 난다. 요즘의 뉴스들을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다.

힘들게 사온 단감은 맛이 좋았다. 단감은 비타민도 풍부하니 몸에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10개에 오천원 하는 단감을 사들고 오지 말아야겠다다고 다짐한다. 몸이 힘들면 마음이 뾰족해지고 세상이 삐딱하게 보이니 정신 건강에는 안 좋을 것 같아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과일값#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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