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인 막내 아이 학부모로서의 역할을 끝으로, 녹색 어머니 활동이 드디어 끝이 났다. 세 아이를 양육하면서 녹색 어머니로 활동한 건 장장 12년이다. 따로 졸업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녹색 어머니회를 12년 만에 졸업한 셈이다.
몇 해 전부터는 전교생 학부모가 1일씩 할당을 받아 깃발을 들 날이 1년에 한 번이면 족하게 되었다. 물론 자녀가 많으면 그 일수가 자녀의 수만큼 늘어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지원자를 받아 지원자들 안에서 일정을 잡고, 반에 할당된 한 주간의 일수를 채워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전업주부라는 이유로 할당받은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강요는 아니나 담임과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부터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또한 두 아이가 함께 초등학교에 몸 담고 있을 시기가 많았으니, 아마도 다른 학부모들에 비해 봉사할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다. 둘째 아이 때는 무려 녹색어머니회 반대표를 맡아서 1주일 내내 봉사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5일 내내 봉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부모들 모임에 가면 늘 나는 하소연했다. 나보다 많이 봉사한 사람 나와보라는 식으로 어려움을 떠벌렸다. 물론 공감해주며 토닥여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하소연이었다. 그렇게 불평을 하면서 꾸역꾸역 섬겼던 활동이었는데, 마지막이라는 말의 심상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자꾸만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을 건드리고,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기게 했다.
"안녕하세요?" 명랑하고 청아한 목소리의 인사말. "으응, 그래, 안녕!" 굳이 장착하지 않았던 친절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등에 울러 멘 가방이 아이의 등짝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몸집이 작은 아이의 얼굴만은 누구보다도 비장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있는 걸로 보아, 1학년인 듯했다. 그럼에도 양 어깨 당당히 펴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란 조끼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녀석의 기세를 보니 "나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무려 초등학생이라고요!"라고 외치는 듯했다.
이후로도 밝게 인사하는 이름 모를 아이들을 많이 마주쳤다. 엄마는 굳이 인사할 마음이 없었으나, 인사하는 자신의 아이로 인해 자연스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나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를 하는 이나, 받는 이나 웃지 않을 수 없는 정겨운 순간들이었다.
아파트 앞이라 교통 정리하는 경비 아저씨들도 정겨웠다. 기껏해야 함께 서 있는 시간 30분인데 동료 의식이 생겼다. 초록 신호가 깜빡이자, 느릿한 아이의 등을 밀어주고 대기하는 자동차 운전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행동도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이루어졌다.
신호가 바뀌는 걸 쉬지 않고 주시해야 하기에 들어 올린 시선이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꽃구름, 시원한 바람이 온 시야에 들어오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이야기 소리, 깔깔대는 웃음소리, 누구야 하며 부르는 소리, 이름은 모르지만 한 동네 주민이라는 소속감으로 미소를 건네는 얼굴들. 미소를 짓게 할 만한 요소들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었다.
다시 섬길 일 없을 녹색 어머니. 마지막이 하소연이 아니라 뿌듯함과 보람이어서 참 감사했다. 비록 녹색 어머니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미소 지을 만한 작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봉사하면서 방법은 터득했다. 고개를 들면 된다. 귀를 열면 된다. 입꼬리 근육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된다. 그 작은 노력으로 인해 사소한 일상에서도 보석처럼 값진 순간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참 유의미한 12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페이스북 그룹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