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방, 사교육, 번아웃, 고물가, 새벽 배송, 중독...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들이다. 한국 사회가 풀어가야 할 이 과제들을 '기사'가 아닌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전달해 보자며 21명의 작가들이 뭉쳤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편씩 문화일보에 연재했던 단편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바로 <소설, 한국을 말하다>이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는 기사보다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은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효과적이다. 나 역시도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 매료되어 기대감을 안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4천 자 내외의 짧은 소설이다 보니 깊은 울림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살펴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
거지방, 오픈런, 새벽배송
굵어진 빗방울이 내 정수리와 이마를 때렸다. (중략) 설마 우산을 사려는 건가? 나는 황급히 언니를 뒤따라갔다. 거지방 참여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지출을 언니가 저지르려 했다. 비 맞기 싫어서 우산 사기. 거지방 참여자들은 입 모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냥 맞으세요. 비 좀 맞는다고 안 죽어요.' (중략) 장대비가 땅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언니가 나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우산 사줄 테니까 쓰고 가." 나는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언니가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우산 좀 산다고 네 삶이 망해?" 나는 온 세상이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어. 우리는 망해. 쫄딱 망한다고!"
- <소설, 한국을 말하다>, 이서수 '우리들의 방' 중에서
정규직 언니에게 솔트 에이징 삼겹살을 얻어먹는 걸로 모자라 고깃집 밑반찬을 슬쩍 챙겨 나오려 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데도 사준다는 우산을 마다하는 주인공의 짜디짠 무지출 챌린지를 보고 있자니 웃픈(?) 미소가 지어졌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아껴야 하는, '절약'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비정규직의 삶을 보고 있자니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요즘의 세태가 떠올라 씁쓸해졌다.
과거엔 좋은 학벌과 안정적인 직업이 행복한 삶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엔 학벌과 직업, 즉 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 보이고 싶은 과시욕이나 경쟁심리가 그런 현상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전염병이 휩쓴 세상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했다. 한쪽에선 경기가 어렵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어떤 이들에겐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중략) 해외로 나가는 발길이 묶이고, 가시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자랑거리들에 제한이 걸리자 명품 시장은 보복 소비라는 말 아래 날로 비대해졌다. 보복 소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수민은 그 말을 만든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었다. 보복할 게 없어서 돈으로 뭔가를 보복하다니. 이보다 더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히 실재했다.
- <소설, 한국을 말하다>, 손원평 '그 아이' 중에서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세상이 패닉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던 그때, 해외여행 수요가 명품 시장으로 몰리면서 고가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가격을 인상하고 소비자들은 한정된 물량을 손에 넣기 위해 '오픈런'을 해야만 했다. SNS를 통해 퍼져나간 이러한 과시적 소비는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키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한때의 유행이라면 좋으련만 이러한 소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로 명품 시장이 위축되었다고는 하나, 이는 슈퍼리치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최상류 층 부자들은 백화점 VIP룸에서 명품 가방보다 훨씬 비싼,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럭셔리 주얼리를 턱턱 사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윤애는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다. 스마트시계가 더 거세게 울린다. 해가 뜬다. 곧 있으면 해가 뜬다. 어물쩍거리다 해가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거란다. 그렇게 말한다. 윤애의 걸음이 더뎌진다. 잘못 디뎌서 넘어지신 거겠지. 잠깐 기절한 거겠지. 곧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겠지. 그러니 돌아가야 한다. 윤애는 새벽이 지나기 전에 배달을 마쳐야 했다.
- <소설, 한국을 말하다>, 천선란 '새벽 속' 중에서
새벽 배송을 소재로 한 소설 '새벽 속'은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아픈 아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본업 외에 주말에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다 죽음에 이른 40대 남편과, 밀려드는 프레시백을 접느라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이 쓰러진 줄도 몰랐던 아내.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오래도록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 사람 목숨과 돈을 저울질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기술 혁신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주리라 예상했지만 기업 간의 경쟁이 가속화되며 사람은 소모품처럼 취급되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AI에게 일자리마저 빼앗길 상황에 놓여있다.
그런 와중에 SNS를 통해 전시되는 타인의 삶은 남루한 현실과 대비되어 우리로 하여금 뒤처졌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만든다.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팍팍한 현실을 살며 힘겨움을 토로하는 시대에 '행복'이란 닿을 수 없는 이상향 또는 희망고문용 단어처럼 느껴진다.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현인들의 말은 분명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사회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국민 개개인의 행복도 커질 수 있을 것 같다.
뉴스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포획 이론'이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기업이나 개인 등의 경제주체가 이익집단을 형성해 정부를 압박하거나 설득해 자기들에게 유익한 각종 장벽이나 규제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우리 삶에도 이를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민 다수가 사회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낸다면 정치인들도 지금보다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라는 프랑스 정치철학자 조지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의 말처럼 말이다.
어떤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더욱 명징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 필요와 가치가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을. 그러니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세태에도 아랑곳 않고, 보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일에 성실하게 복무하는 이들ㅡ우리의 작가들!ㅡ은 얼마나 소중한가.
- <소설, 한국을 말하다>, '기획의 말' 중에서
앞만 보고 달리느라 기사나 뉴스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부드러운 '소설'의 옷을 입고 다가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명징하게 보여줌으로써 사유와 성찰로 이끄는 이 책이 반가웠다. 더불어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우리 역사의 비극적 단면을 조명한 작품인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참 다행스럽고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한다.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두어야 할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그런 책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가 국민 다수의 관심사가 된다면, 음지에서 눈물 흘리는 사회적 약자의 숫자가 지금보다는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행복'이라는 단어도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브런치스토리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