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는 은빛으로 가을바람을 탔다. 아이들은 세종시 도심의 정중앙, 야생의 들판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조막손은 의욕적으로 낫을 들었지만 벼 밑동을 자르는 데에는 힘이 부쳤다. 엄마 아빠가 도와줘서 벼를 벴고, 처음 보는 손홀태로 탈곡도 했다. 이렇듯 가을걷이를 마친 아이들은 새들이 날아드는 들판에서 힘차게 뜀박질을 했다.
지난 2일 오전 10시, 세종 도심 속의 섬처럼 남아있는 야생의 공간인 장남들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장남들보전시민모임(시민모임)이 주최한 '금개구리학교 3교시'인 가을걷이 행사에 참가한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녹색 울타리를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봄에 열린 1교시 모내기, 2교시 여름밤 마실-곤충관찰에 이은 이날 행사에는 4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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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막손에 낫 들고... 아주 특별한 '가을걷이'
장남들은 세종시 이응다리 앞쪽 96번 임시도로를 사이에 두고 금강과 마주한 배후습지이다. 예전에는 전월산과 원수산 등의 육지생태계와 연결된 드넓은 들판이었다. 하지만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된 뒤 도로와 건물 등으로 단절됐고, 규모도 10분의 1로 줄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금개구리 서식처인 이곳 2만여 평의 보존지구 안에서 논농사를 짓는데, 이게 이곳 생물다양성의 원천이다.
이날 3교시의 첫 수업은 벼 베기였다. 아이들은 조막손으로 낫을 들었다. 지난봄에 이곳에 와서 모내기를 했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이곳 농부들이 추수를 하고 이날 아이들을 위해 남겨 놓은 30여 평 남짓 공간의 벼 앞에 서서 벼 밑동을 손으로 힘껏 움켜쥐고 낫으로 베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부모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도왔다.
낫질은 어려웠지만, 타작은 쉬웠다. 나무 빗살 사이로 벼 이삭을 넣고 빗어서 알곡을 훑는 전통 손홀태는 아이들에겐 그저 장난감이었다. 엄마 아빠가 베어낸 벼를 한 줌씩 들고 손홀태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장난감을 다루듯이 알곡을 훑은 뒤 한쪽에 볏단을 놓았다.
"여기 떨어진 알곡으로 아주 근사한 밥상을 차릴 겁니다. 겨울에 흑두루미와 같은 철새들에게 먹이로 뿌려주는 거죠. 그리고 알곡을 털어낸 볏집으로는 지금부터 복빗자루를 만드는 작업을 할 겁니다."
조성희 시민모임 사무국장의 이같은 설명이 끝나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끈과 가위 등의 도구들을 챙겼다. 자연에서 난 천연 소재로 전통 공예를 체험해보는 시간. 엄마 아빠가 집 안에 걸어둘 복빗자루를 만드는 동안 아이들은 낫을 들고 벼를 베거나, 손홀태 앞에서 계속 탈곡을 했다.
조 국장은 "저희가 봄에는 모내기, 여름에는 야간 곤충관찰을 했고, 오늘은 3교시 가을걷이인데요, 오는 겨울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에는 흑두루미 식당을 열고 탐조를 할 예정"이라면서 "올해 금개구리학교 4교시는 이렇게 마무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심 속에 숨은 보물" "아이들이 이곳 기억했으면"
부모와 함께 이곳을 처음 왔다는 윤재인군은 이날 참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도심 속에 이런 데가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광활한 곳에서 오랫동안 천연기념물이 보존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이곳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하영씨(세종시 소담동 주민)는 "아이들과 함께 1교시와 2교시에 참석을 했고, 오늘은 가을걷이를 하려고 나왔다"면서 "원래 동물들이 주인이었던 이곳을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고,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서 매번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추수 때에 새참을 빼놓을 수 없다. 가족 단위로 옹기종기 모여서 시민모임이 준비한 가래떡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날 마지막 이벤트는 들판 달리기였다. 조만간 멸종위기종인 큰고니와 큰기러기, 흑두루미가 날아와서 볍씨를 먹으며 쉴 논바닥, 아이들은 조성희 국장의 안내에 따라 벼베기가 끝난 공존의 땅에서 뜀박질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김지훈 시민모임 대표는 "장남들에는 160여 종의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데,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금개구리와 맹꽁이와 같은 법정보호종 때문에 더불어 보호를 받고 있다"면서 "도심 속에 멸종위기종이 찾아오는 이곳은 인간의 문명과 지구 생태가 서로 대척점에 서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날 10시에 시작된 가을걷이 행사는 오후 12시30분께 끝이 났다. 아이들은 조막손으로 벼를 벤 뒤 자기들이 탈곡한 볏단으로 만든 복빗자루를 들고 가을 들판을 나섰다. 아이들이 떠난 야생의 공간엔 가을바람이 가득했다. 미처 베지 못한 벼들이 멀리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금빛으로 흔들렸다. 잠시 부산한 것을 피해있던 새들이 다시 야생의 섬으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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