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 민간인통제 구역 안에 있는 두타연은 신비로운 계곡이다. DMZ와 접해 있어 지난 50년 간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개방이 되었어도 사전 예약에 의한 엄격한 통제로 쉽게 갈 수 없는 공간이다. 예전에는 이 산길을 넘어 금강산에 이르렀다. 이 아름다운 산의 숲길을 따라 8리 32킬로를 내닫으면 1만 2천 봉의 산세를 맞이하던 노정이다.
몇 해 전 '통일기원 DMZ 걷기 대회'에 참여한 덕에 동해에서 서해까지 240여 킬로 남짓한 거리를 행군했다. 그때 발에 물집 잡히며 비바람과 태양에 몸을 맡겨 힘겹게 산등성이를 넘었기에 두타연의 물줄기를 만났을 때 가슴 깊은 상쾌함을 느꼈다.
한여름의 퇴약볕으로 땀에 절은 무리 앞에 펼쳐진 수정 같은 계곡 물은 환호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계곡을 휘감은 물이 바위 사이로 모여 낮은 폭포를 만들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맑은 호수가 받아내는 형국이었다.
그때는 누가 말 할 것도 없이 등산화를 벗어 발과 몸을 식히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그렇게 두타연의 투명한 옥색 물빛을 바라보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전쟁과 분단으로 접근할 수 없었고,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통과해서 너른 물가에 몸을 쉬게 하는 순간은 실로 벅찬 감동의 물결이었다.
그런 추억을 간직한 채 이번 가을에 다시 두타연을 찾았다. 10여 명의 동행자들은 초행이라 이번 나들이의 예약과 안내를 내가 맡았다. 제한된 인원이 정해진 시간에 출입해서 같은 차량으로 퇴장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GPS가 장착된 목걸이를 걸고 다녀야 하는 통제구역이다.
지난번엔 두타연 물줄기를 따라 상류로 이어지는 금강산 가는 옛길 전부를 걸어서 행군했지만 이번엔 두타연 주변 생태탐방로로 제한되었다. 가을을 알리듯 나뭇잎은 노랑과 빨강 사이의 색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두타연의 단풍두타연 주차장에 내려서 처음 마주한 조형물은 설치한 지 얼마 안 되는 마을 모형이었다. 남북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위치했던 문등리마을인데 형석이라는 지하자원이 매장된 곳이어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번창했던 도시였다.
광산 주변으로 경찰서와 소방서 학교와 시장 마을이 형성되어 양구시내보다 먼저 전기가 들어왔던 번화했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을 모형으로나마 추억하고 아쉬워하며 양구전투위령비로 향했다.
위령비 하단에는 우리의 육군은 물론이고 해병대 및 불란서, 화란 등의 병사를 추모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휴전 협정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가 피의 능선을 이루었고 남과 북의 수많은 생명과 외국인의 목숨마저 앗아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며 조각공원을 가로질러 터만 남겨진 두타사 경내를 거닐었다. 공원의 잔디가 푸른빛으로 평화로운데 전시된 탱크와 나이키미사일 등의 위용은 우리가 여전히 분단상태인 휴전국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물줄기를 바라보며 두타정에 오르니 상류와 하류로 이어지는 계곡의 형세와 숲의 지형이 한눈에 굽어 보인다. 잘 정리된 보행로를 따라 산책하듯 발을 디뎌본다. 물가 옆에 늘어선 단풍의 빨간 빛깔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데 모두들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산책로 양편으로는 숲이나 산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표지가 여기저기 걸려있는데 무시무시한 지뢰 표시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반대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출렁다리로 되돌아올 수 있지만 물이 불어서 돌다리를 건널 수 없음이 아쉬웠다.
그래도 오순도순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두타연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자연스럽게 폭포가 보이는 물가 앞으로 모였다. 백록담 같은 호수에 떨어지는 폭포를 한눈에 포착할 수 있는 위치니 사진 한 컷 기념으로 남기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번에는 없었던 입수 금지와 접근 금지 라인이 지나치게 많아졌음을 느끼며 사방으로 지키고 있는 군병력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만나자 사정없이 옥빛 물에 얼굴을 처박고 더위를 식히던 감동과 짜릿함은 덜했지만, 초행으로 방문한 아내와 교인들의 흡족한 모습에서 만족함을 얻는다. 여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가을의 빛깔과 향이 다르긴 했다. 더구나 편안한 사람들과 동행하며 맛난 점심을 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면 평화의 댐으로 이동해서 오래 걸을 생각이었는데, 일행 중 한 명의 강력한 요청으로 양구 박수근미술관행이 추가되었다. 일행이 원하면 일정을 수정하는 유연성을 보이는 게 바람직한데, 하물며 그 안이 아내의 견해라면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 평화로운 것이니…
두타연, 평화의 댐, 박수근미술관을 가을에 둘러봤기 때문인지, 좋은 사람들과 동행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알차고 흥겨운 시간이었다. 박수근 미술관의 이야기는 조금 더 풀어놔야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