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정 모르고 시를 썼다
무지개는 잡히지 않고
벼랑 끝에 시만 남았다
시를 읽다 잠들었다
깨어보니 아랫도리가
시집에 덮여 있다
세상의 원죄라 여겼던 곳을
시가 덮어주었다
- <시인하다> 전문
머리 맡에 두고 잔 시집을 아침에 읽으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시를 썼"으나 "무지개는 잡히지 않고/벼랑 끝에 시만 남"았다고 말하는 시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을처럼 깊어진다. "세상의 원죄라 여겼던" 그녀의 "아랫도리"에 덮인 시집을 시방 내가 읽고 있으니 어찌 아니랴.
내가 하나의 레크레이션으로 시를 쓸 때 그녀는 실존의 위기 속에서 시를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원죄"와 "아랫도리"는 사랑이 매개하고 있다. 조동례 시인의 실존에는 시와 사랑, 거기에 "가난"이라는 한 축이 더 있다.
내가 아는 조동례 시인은 평화주의자다. 아니, 무슨 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면 그뿐인 사람이다. 어쩌면 시와 사랑도 그녀에게는 어느 날 하산 길에 만난, 눈앞에 얼쩡거리는 하루살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만만치가 않다.
하산 길/하루살이 한 마리/눈 앞에 얼쩡거린다/해는 막장인데/자꾸 늦어지는 걸음/손바닥을 펴 쫓았더니/눈 깜짝할 사이에/눈동자 속에 갇혀버렸다/하루가 영원 같은/눈먼 사랑 때문에/앞이 캄캄하다/너를 꺼내면/내 눈은 또 얼마나 아플 것인가
- <하루살이 사랑> 전문
나도 가끔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지나다가 그런 일(하루살이가 눈 속에 갇히는)을 겪기도 한다. 나는 잠깐 눈물이 나고 말지만 하루살이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윤리적인 사건일 뿐이지만 그녀에게는 아픈 사랑의 일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합일'이라는 보편적인 사랑의 정의에 부합하는 언급을 한다. 해설을 쓴 오민석 문학평론가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하나가 되는 모든 것이 사랑의 원리는 아니다"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동질성의 폭력"은 한쪽의 희생을 전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동례 시인의 시에서도 "한몸이라고 착각했"다가 "너는 너 나는 나"로 돌아서는 일이 다반사다. "나에게 꽂혀 한몸이었던/흔들리던 이를 뽑고 나니/너는 너 나는 나(한몸이라고 착각했던 우리)"라는 사실을 늦게서야 깨닫게 된다. 다음 시를 보자.
진짜 같은 가짜 미끼/말랑말랑한 루어를 물고/놓지 않으려 놓치지 않으려/너에게 버티던 세월이여/심연에 닿은 미끼를 물고/사랑도 세상도 끌려가면 끝장인데/그때 파도가 없었더라면/무슨 힘으로 놓았겠는가
- <가짜 미끼> 부분
오민석 평론가는 "가짜 미끼를 물고 끌려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신을 미끼와 하나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신비이지만 하나로 강요되는 폭력을 경계해야만 하는 꾀나 어려운 과업인 것이다.
시집 1부에는 조동례 시인이 알래스카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 쓴 시로 보이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춥고 어둡고 겨울이 긴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들은 강 한가운데 깃발을 꽂아두고 쓰러지는 날 맞추기"를 한다. "깃발이 쓰러지면 얼었던 강이 녹았다는 신호"다. 그러니까 그들이 강에 드리운 깃발은 "봄을 낚는 찌"가 되는 것이다.
춥고 어둡고 긴 겨울/봄을 낚는 미끼는 기다림이어서/깃발이 쓰러지면 봄이 왔다는 신호 - <에스키모 봄 낚시> 부분
그 긴 기다림이 시인에게는 사랑을 위한 기다림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두려움을 모르는/아이의 눈빛이 아니라면/누가 달려와 설산에 젖을 물릴 것인가"라는 어딘지 신비롭고 탄탄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문장도 시인의 사랑을 위한 기다림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 기다림이 좀 더 길어지고 깊어지면 "구걸"이 되기도 하겠다.
빵을 구걸하듯이/사랑을 구걸하면 안 되나요?/지구 반 바퀴 돌아 늪에 갇힌 내가/막판에 남은 햇빛을 구걸하고 있어요 - <빙하는 속부터 녹고 있다> 부분
시인은 알래스카에서 거주하는 동안 "추가치 산맥 설산"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새끼를/절벽으로 몰아가는 어미"를 목도하기도 한다. "툰드라 풀냄새 등지고/빙하 바람 채찍 삼아/가파른 길 오르는 산양 일가족"을 향해 "도중에 망한 집이 어디 너뿐이더냐/가난이란 천적을 피해/여기까지 오는 데 평생 걸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당부를 전하기도 한다.
"잊지 마라/최후의 천적은 북극곰이 아니라/네 안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니/마음만 비운다면/위태로워서 안전한 절벽이다 - <안전한 절벽> 부분
새끼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어미 산양의 행위는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절벽으로 몰아가는 것은 새끼에게 도래할 수도 있는 더 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론 시인 자신을 산양의 운명에 비유해서 스스로에게 한 당부인 셈이다.
여기서 "위태로워서 안전한 절벽"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이런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다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비워야 하는 숙제가 있다. 이 마음을 비우는 일이 또한 사랑의 일일 수도 있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시 사랑을 믿기로 한다. 안 믿으면 또 어쩔 것인가. 사랑이란 사건이 없다면 삶도 없을 것인데. 이왕이면 마음 편한 사랑이기를 바랄밖에.
사랑을 안 하니까 세상 편하더라/비구니 같은 노 시인의 저 거짓말/상사화 꽃 진 자리 새잎 올리듯/거짓말 뒤에는 참말 있지/사랑을 안 하니까 편하다는 말/뒤집어 생각하면/뒤틀린 마음에 속엣말 같아서/달뜬 힘으로/참말 같은 속엣말을 믿기로 한다/마른 풀잎이 봄눈 녹이듯/다시 사랑을 믿기로 한다
- <다시 사랑을 믿기로 한다> 전문
순천 출생인 조동례 시인은 "산 하나를 넘으면서/어처구니 사랑을 만나/두 번째 산에서/달은 가리키던 손가락이 칼에 베인 뒤/절필을 생각하며/길을 잃고 일박했다"라고 '시인의 말'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면서 "허기를 양심으로 때우며/빗방울이 마음을 두드리는 저녁까지 왔으니/이제 시를 쓰지 않아도/살아지거나 사라질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녀가 낸 세 권의 시집 제목이 '시인의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김규성 시인은 추천사(표4)에서 "조동례의 시적 정조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선구先驅 중, 단연 소월의 계보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예컨대 끓어오르는 정한을 초인적 인고 치밀한 함축과 절제로 다스려 꽃피운 감성 미학은 그가 성취한 금자탑이다"라고 상찬한다. 이에 걸맞은 짧은 시 한 편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면서 글을 갈무리할까 한다.
대체 사는 게 뭐냐고
한마디 써달라 했더니
무한 허공에
향기를 쫘악 엎질러버렸습니다
- <붓꽃>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