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범과 그 공범들을 지구 끝까지라도 추적해 반드시 처단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사망이 잇따르던 지난해 이같이 말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전세사기범들은 죗값을 치렀을까. 그리고 피해자들은 피해를 회복했을까.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입에선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왔다. 이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며 "윤 대통령의 말과 달리 전세사기범과 그 공범들은 무더기로 무죄와 감형을 선고받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천지방법원 2심 재판부(부장판사 정우영)는 지난 8월 27일 선고 공판에서 인천 미추홀구에서 대규모 전세사기를 벌인 '건축왕' 남아무개(63)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1심 징역 15년에서 절반 넘게 형량이 줄었다. 공범으로 기소된 이들도 1심에선 징역 4~13년을 선고받은 것과 달리 2심에선 무죄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에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6일 대법원 앞에서 남씨 일당의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 피해대책위 안상미(46) 위원장, 강민석(55)·박순남(49)·최은선(43) 부위원장을 만났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들은 "이 재판의 결과는 또 다른 전세사기 사건들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해 "최근 사건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것을 체감한다"며 "누구나 전세사기를 당할 수 있는 잠재적 피해자이니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아래 인터뷰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유서까지 냈는데... 법원, 보긴 했을까"
- 전세사기 피해를 인지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지내셨나요?
안상미 위원장(아래 안) : "프리랜서로 일하다 지금은 백수가 된 상황이에요. 그동안 모아뒀던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벌써 (전세사기를 겪은 지) 3년이 되어가니까 그 돈은 다 썼죠. 이웃들도 저랑 비슷한 상황이더라고요. 저는 경매가 끝나서 최우선 변제금 2700만 원을 받았는데, 그거에 손대고 있어요. 심각하죠."
최은선 부위원장(아래 최) : "저는 결혼 계획이 무너졌어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 결혼해서 그리로 가야지 생각했고, 실제로 당첨이 됐는데 작년에 포기했거든요. 이 전셋집 돈도 못 돌려받고 있으니까요. 기자회견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책위 활동이 평일 오전에 이루어지다 보니, 일도 못하고 있고요."
강민석 부위원장(아래 강) : "처음에는 '6개월이면 이 사태가 해결되겠지'하는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일을 하고는 있는데 (근로 시간이 줄다 보니) 소득도 많이 줄었고요. 사실 저는 나중에 내 집 마련을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간 전세를 살면서는 늘 보증금을 돌려받았으니까요. 이곳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후에는 '꼭 집을 사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순남 부위원장(아래 박) : "현재까지도 월급의 50% 정도를 이자 갚는 데 쓰고 있어요. (전셋집) 경매가 개시됐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제가 낙찰을 받았어요. 그런데 기존 전세대출금을 갚아야 구입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거든요. 저는 전세보증금을 잃어서 돈이 없으니 가족과 지인 등 빌릴 수 있는 곳을 다 끌어모아서 기존 대출을 막았어요. 부족한 부분은 신용대출을 받고요. 근데 이에 대한 지원이 하나도 없어요.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저 같은 피해자들한테는 아무런 지원이 없어요. 정부가 피해자들을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는 근거죠."
-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남씨는 2심에서 징역 7년으로 감형됐고, 공인중개사 등 공범 9명도 무죄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강 : "저희는 공판 대부분을 방청했어요. 2심 선고 날은 판사가 '죄는 있지만 무죄'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판사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겠지? 설마 이대로 끝나나?' 생각하며 피해자끼리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남씨 일당들은 꽃을 들고 와서 서로 축하를 건네고...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법정 안에서 소리치는 것밖에 없었어요. 저희는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안 : "이 사건이 대법원까지는 안 갈 줄 알았어요. 피고인들 혐의가 너무나도 뚜렷하고 정황 증거들도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아요. 2심 선고 공판 때 판사들이 판결을 읽고 우르르 나가길래 법정 안에서 "사기 공화국"이라고 외쳤어요."
최 : "저는 솔직히 1심 판결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남씨만 최고 형량이었고 나머지 공범 9명은 그 보다 형량이 낮았으니까요. 2심에서는 형량을 더 올려주길 바랐고, 무죄나 집행유예는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피해자 중 돌아가신 분 중엔 '제발 더 많은 죽음이 생기기 전에 해결해 달라. 죽음으로 탄원한다'라는 유서를 쓰신 분도 있었어요. 저희가 그 유서도 법원에 제출했는데... 법원에서 보기나 했을까요?"
박 : "이 재판의 결과가 민사 재판이나 또 다른 전세사기 사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해요. 저만해도 당장 이 사건의 피해자로 포함되지 않아서 '나도 피해자'라고 추가로 고소할 수 있게 돼요. 지금 이 재판엔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전세 계약을 맺은 191명, 범죄단체조직죄 등이 적용된 추가 기소 건까지 포함하면 665명만 피해자로 포함돼 있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파악한 피해자는 2500명 이상이에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알리기 어려워서 아직도 고소장을 제출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겠죠. 그런 사람들도 이 재판을 계속 지켜보는 거예요."
"윤 대통령 발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 윤 대통령이 "전세사기범과 그 공범들을 지구 끝까지라도 추적해 반드시 처단하라"고 주문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계신다고요.
최 : "당시에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젠 과거 발언들이 사태를 무마시키기 위함이었음을 알겠어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거죠. 윤 대통령에게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말하고 싶어요. 요새 뉴스를 보면 '우리가 윤 대통령이 아니라 김건희 여사를 찾아가야 했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만큼 지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다시 선거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여기저기에서 불러대고 관심 있는 척이라도 해줄 테니."
안 : "윤 대통령이 저 말을 했을 때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비극적인 소식이 잇따를 때였어요. 이제는 더 이상 피해자들이 죽지 않으니 관심이 없는 걸까요? 국가가 제도의 잘못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피해자들을 국가가 지원하고 모두 구제할 텐데,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잖아요. 솔직히 지금은 국가가 존재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 최근 걱정은 무엇인가요?
안 : "11월 11일부터 특별법 개정안이 시행되는데 약속과 달리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피해주택을 낙찰받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시행될 개정안엔 'LH가 피해주택을 낙찰받아서 매입가와 감정가 사이의 차액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이 있어요. 개정안 통과 직후 면담에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도 '걱정하지 말라. 피해 아파트가 노후화됐더라도 건물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지을 각오로 모든 집을 매수하겠다'고 말했어요. '개정안 시행 전 경매되는 집에도 소급 적용하겠다'고도 했어요. 그런데 오늘(11월 6일)까지 저희 아파트에 경매 올라온 6채 중 LH가 낙찰을 받은 건 2채뿐이에요. 11일 이후에도 LH가 낙찰을 받지 않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는 거죠."
강 : "지난 8월에 여당과 2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봤다는 게 참... 그때 국회에서 국토위 위원들이랑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저희가 '이전에 신용대출 받은 걸 저리로 바꿀 수 있게 해달라'라고 말했더니 권영진 국민의힘 의원(간사)이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나'라면서 해줄 것처럼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그런 소급 적용은 없다'라고 하더라고요."
박 : "2심 선고를 앞둔 지난 7월에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저희가 기자회견을 했는데 취재진이 한 명도 안 오더라고요. 비슷한 시기에 미추홀경찰서 앞에서도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기자분이 한 3명인가 왔어요. 올해 들어서는 거의 취재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언론사마저도 취재를 안 나오는 걸 보면 일반 대중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예상이 되는 거죠."
-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박 : "'나라가 전셋집에 안전히 살 수 있는 법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제 주변에 '전셋집을 계약하려는데 뭘 조심해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저는 '이대로면 향후 10년, 20년 뒤에도 안전하지 않을 거다'라고 말하거든요. 독자 여러분께도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최 : "이 상태면 전세사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판결이 이런 식이면 더 많은 사기꾼을 양성할 거고요. 오히려 전세사기를 안 치는 사람이 이상한 나라가 돼버렸어요. 지금은 임대인이 전세보증금 2억 원을 받고 2년 뒤 계약 끝날 때 안 주면 그만이잖아요. 전세사기가 하나의 새로운 사업이 된 것 같아요. 저희야 '이제 한 번 당했으니까 다시는 전세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마음이 있을 건데, 또 다른 누군가는 전세를 살겠죠. 그분들도 모두 잠재적 피해자라는 점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안 : "'당신도 당할 수 있으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모두 피해자 책임이에요. 전세대출을 받으면 (은행이) 임차인의 신용을 바탕으로 임대인 통장에 입금하잖아요. 하지만 전세사기를 당할 경우 원금을 갚아야 할 책임이 피해자들에게 생겨요. 앞으로는 전세대출 시 임차인 신용이 아닌 주택 가치를 기준으로 실행하고, 전세 계약 만기 때 원금은 임대인이 돌려주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느 정도 전세사기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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