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숨은그림찾기'를 했던 기억은 모두 있을 거다. 나도 찾은 그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열심히 찾았다. 마지막 하나까지 다 찾았을 때의 성취감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최근에 출간한 최명숙 작가님의 <숨은그림찾기>를 읽었다. 최명숙 작가는 40이 넘어 늦게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 박사가 되신 분이다. 지금도 60대 후반이지만 문학 강의하며 후배를 양성하고 있다. 책 표지와 본문 삽화는 화가인 아드님이 그렸다고 한다.
소설 제목을 보고 작가님이 찾으려는 숨은 그림이 무얼까 궁금했다. 작가님은 소설을 쓰며 만난 것이 '찾기'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고를 마무리하고 난 후, 내 속에서 무언가 쏙 빠져버린 듯해 며칠 동안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처절했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였다.
이 책은 <푸른사상 소설선 63>으로 표제작인 <숨은그림찾기>를 시작으로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님은 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분이라 대부분의 소설 시대상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표제작인 <숨은그림찾기》는 주인공이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요령과 학창 시절 늘 허탕을 쳤다는 보물찾기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물레방앗간, 박수무당, 굿판, 화투 재수 떼기,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시앗을 들여 아들 낳기 등 시대상이 보인다.
작가가 찾으려고 했던 <숨은 그림>
이 소설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첫 키스의 주인공인 고향 친구 재영이와 이복오빠, 성폭력을 하려고 했던 친구 영미 오빠다. 이 일로 탈출하듯 대학에 가며 고향을 떠나게 된다.
주인공은 결혼 후 불임으로 아이가 없었다. 남편이 정확하게 확인은 안 해보았지만, 외도 정황이 있었는데 헤어지자고 해서 합의 이혼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회사 신입사원이었던 유민호는 하룻밤을 함께 보냈으나 얼마 후에 결혼한다는 말을 남긴다. 주인공은 남자에게 크게 휘둘리지는 않는 성격이지만, 결국 남자로 인해 인생이 달라짐은 어쩔 수 없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 주인공은 재영과 만나고 이야기는 궁금증을 남기고 다음과 같이 끝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켠다. 새벽 5시, 널브러진 잡지, 동그라미 친 숨은 그림, 조용히 움직이는 시곗바늘, 벽지 속 그림이 서서히 깨어나고 옷가지도 부스스 몸을 턴다. 잡지 속의 그 힘들도 튀어나와 방안을 휘젓고 다닌다. 하나 남은, 숨은 그림을 찾으려 잡지를 끌어당긴다. 창문이 푸릇한 기운을 머금고 희부예지고 있다.-p.33
작가가 찾으려고 했던 숨은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찾은 숨은 그림은 이것이다.
작가는 평소의 글에서도 나무 이름, 꽃 이름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다. 이 짧은 소설에도 여러 개의 나무 이름, 꽃 이름이 등장한다.' 오동나무, 불두화, 구기자나무, 사철나무, 매화나무'가 언급된다. 다른 소설에도 다양한 나무 이름과 꽃 이름이 나와 읽으면서 미소가 지어진다.
시골에서 자랐어도 최명숙 작가님처럼 식물 이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문데 그만큼 관심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최명숙 작가님은 브런치 스토리 작가이기도 하다. 요즘 브런치 스토리 연재글도 <꽃 속에서 놀던 때가>로 꽃과 얽힌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내신다.
내 인생의 숨은 그림
또한 소설을 읽으며 여러 번 등장하는 '그것'이 무얼까 궁금했다. 다음 문장을 읽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길 바란다.
나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다. 가을이면 그것에 불을 붙인다. 몇 년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가을에서 겨울까지 그것을 태우고 봄이면 끊는다. 산 빛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9월 말쯤 되면,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이는 설명 못할 어떤 바람에 휩싸인다. 그리고 무심코 그것을 산다. 그 후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그것에 불을 붙인다. -p.12 본문 내용
나는 소설의 끝부분에서야 그것이 담배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소설에서 독자의 마음을 궁금하게 하고 소설 속으로 끌어드린다.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다.
<숨은그림찾기>를 읽으면 소설에서 마치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즉, 오래전 관계를 맺었으나 인연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이들과 조우하거나 혹은 술래처럼 그들을 찾아 헤매는 인물이 많다.
< 달빛>의 작은 엄마가 그렇고, <아주 진부한 것들>의 성주 동생 성희, <열쇠>의 정우와 <유를 찾아서>의 윤유유를 통한 천유가 그렇다.
여섯 편의 소설 중 <두 남자 이야기>를 읽으며 많이 웃었다. 두 남자는 '너무 성실한 남자'와 '세상에서 미루기를 가장 잘하는 남자'이야기인데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이 있어서 정말 재밌었다.
삼촌은 게을렀고 느렸다. 할머니가 낳은 아들 넷, 딸 넷 중에 막내인 삼촌은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엄마는 건넌방에서 나를 낳았고, 할머니는 안방에서 삼촌을 낳았다. 생일도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게, 그것도 내가 하루 먼저 태어났다. -p.16
세상에서 가장 미루기 잘하는 삼촌은 딱 맞는 숙모 만나 잘 살고 있다. 무남독녀인 숙모 만나 처가 재산을 다 물려받게 되어 평생 일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아도 다 못 쓴단다. 더구나 숙모는 말똥구리처럼 미루는 게 특기인 삼촌을 죽기 살기로 사랑한다나 뭐라나. -p.168~169
평소에 브런치 스토리에서 최명숙 작가님 글을 읽으며 느낀 것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추억이 많다는 거다. 이번 소설을 읽으며, 혹시 이건 작가님 이야기 아닌가 하는 것도 있었다. 두 번째 소설인 <달빛>이 그렇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와 할머니와 살았던 작가님을 아버지처럼 보살펴주었던 삼촌이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작가의 삶이 그려지기에 소설 한 편 한 편이 작가님을 닮았다.
<숨은그림찾기>는 편하게 읽히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그냥 술술 넘어가진 않는다. 문학 박사님이시고, 지금도 소설 강좌를 운영하시는 분이라서 소설의 재미도 느껴질 거다. 읽으면서 어떤 것은 소설이 아닌 작가님 이야기를 쓴 산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30, 40년 전의 기억이 현실로 연결되는 이야기가 그렇고, 소설에 할머니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다.
소설을 읽으며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따뜻함이 차가움을 녹이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또한 오래전에 잊고 살았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추억할 수 있었다. 요즘 판타지 소설도 많지만, 고전 같은 따듯한 소설을 읽고 싶은 분은 꼭 읽어 보시라고 추천드린다.
이 책에서 작가가 찾으려고 했던 숨은 그림은 '인연'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인연이지만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작가는 끊임없이 숨은그림찾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작가의 숨은 그림을 쫓다 보니 어느새 나도 내 인생의 숨은 그림을 찾고 싶었다. 내 인생의 숨은 그림을 나도 열심히 찾아보아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