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도 한 달 가량 한여름을 방불케 하던 기온이 한순간에 떨어지자 스웨터가 하나 떠올랐다. 꺼내 입으려 찾는데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이 방, 저 방, 붙박이장이며 서랍장을 다 뒤져봐도 없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입은 기억이 없는 그 스웨터가 왜 갑자기 생각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보이질 않으니 찾아야겠다는 집착이 내 안에 가득 차서 반나절 동안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그래도 보이지를 않아 지쳐 소파에 털썩 앉았는데 느닷없이 거실 한구석에 오도카니 서 있는 반닫이 장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봤더니, 그토록 찾던 스웨터 뿐 아니라 두꺼운 겨울옷 여러 벌이 그 안에서 나왔다.
대체 몇 년 동안 반닫이 문을 열지 않았던 걸까? 반닫이 위에 여러 물건과 화분 등을 올려놓고 날마다 물을 주면서도 정작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물건이 귀했더라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반닫이를 잊고 산 시간이 부끄러웠다.
반닫이는 이십 대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어느 날 우연히 고가구 가게 앞을 지나다가 반닫이가 내 마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서울로 유학 오느라 가족과 떨어져 살며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들여다본 고택의 방에 가구라고는 소박한 반닫이 하나 그리고 위에 올려진 이불 한 채가 그리는 풍경이 단순하고 소박해서 좋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닫이는 거실에 있는 여러 물건 사이에서 좀 튄다. 그럼에도 여태 끼고 있는 건 왤까? 놋쇠로 만든 호리병 문양, 나비 문양이며 물고기 모양 자물쇠 그리고 반닫이의 몸을 이루는 나뭇결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내게 의미 있는 까닭은, 시간을 축적하고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간을 내 관심 밖에 있긴 해도 내 젊은 시절부터 함께해온 거의 유일한 물건이니까. 내 삶에 닻을 내리고 공간을 공유하며 시간을 기록하는 물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닫이에 엮인 과거를 떠올리다 방자 유기 푼주가 생각났다. 친정어머니가 결혼할 때 마련한 혼수품이었다고 하니 60년은 족히 넘은 물건인데, 어머니께서 어느 날 처분한다시길래 들고 왔다. 안 그래도 시간이 흐른 뒤 더 이상 어머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 어머니를 떠올릴 물건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밝은 황금색이었을 푼주는 녹으로 뒤덮여 을씨년스럽게 칙칙했다. 아쉽게도 어머니는 이 물건을 혼례 때 가지고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방자 유기가 귀한 물건이어서 처음엔 아끼다가 이내 더 가볍고 좋은 물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면서 완전히 잊혔기 때문인 것 같다.
푼주를 보며 딸의 혼수품을 구입하셨을 외할머니를 상상한다. 사진으로밖에 만난 적 없는 외할머니를 떠올릴 유일한 물건이다. 이 물건은 어느새 백 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물건에 깃든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대를 물려줄 물건을 상실한 시대이기도 하다. 유행이라는 쓰나미가 시시때때로 우리를 삼켜버린다.
자본은 '광고'라는 사제를 고용해서 쉼 없이 설교한다. 더 새롭고 더 멋진 더 근사한 나로 만들어줄 바로 그 물건의 구매 버튼을 얼른 클릭하라고.
상상할 수 없이 싼 가격에 팔리는 수많은 물건, 배달되자마자 버려지며 딜리버 스루Deliver-through('배송 즉시 버린다'는 뜻), 패스트래쉬Fast+trash 대열(패스트 패션에 빗댄 표현으로 실시간으로 생기는 쓰레기를 의미)에 동참하는 것이 소위 '힙한' 것인 양 착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체 우리에게 물건은 어떤 의미일까? 엘리트 지위로 올라가는 출입증일까? 근사한 나를 입증해 줄 증명서일까? 우리에게 정말 긴요한 물건은 어디까지일까?
옷장을 열면 차고 넘치는 옷들 사이에서 왜 계절이 바뀌면 입을 옷이 없는 걸까? 이런 현상을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과시적 소비'라는 말로 정의했다.
이제 옷은 하나의 신분증이 돼 버린 걸까? 소외되지 않으려는 불안한 심리가 유행이라는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와도 지치지 않고 올라타려는 건 아닐까?
물건의 탄생은 유한한 지구 어딘가에서 채굴을 하든 경작을 하든 토지와 노동을 착취한 결과이다. 게다가 물건의 탄생은 폐기의 공간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그 어느 과정도 지속 가능할 수 없는 이 구조를 우리는 왜 어떤 질문도 없이 수용하는 걸까? 도대체 우리는 어느 규모까지 이런 생산과 소비 그리고 폐기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얼만큼 성장해야, 어느 정도로 물건을 소비해야 적절하다고 느끼는지 자신에게 물어본 적은 있을까?
뒤처지지 않으려면, '힙해'지려면, 당신의 품격을 보여주려면 얼른 돈을 써서 소비하라고 광고는 온갖 미디어에 툭툭 튀어나와 고함을 질러 댄다. 특히 '블랙 프라이데이'가 자리한 11월은 그 고함이 극대화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이 11월 마지막 금요일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 BND)'은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국제적인 날로 여겨지며, 매년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다가오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에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그리고 함께할 물건을 찾아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글 최원형 환경생태작가.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11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