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공식 명칭은 '여수 순천 10.19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의미다. 3.1 운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도 모두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최초 일어난 날짜에 사건의 내용을 이어 붙이는 게 일종의 관례다.
'사건'이라는 명명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저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으론 아직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하여 '제주 4.3'처럼 부러 사건이라는 이름을 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 4.3 평화공원 기념관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채 누워 있는 '백비'가 웅변하려는 것도 그것이다.
누구는 '여순 항쟁'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한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양비론이나 양시론에 은근슬쩍 기댄 두루뭉술한 분석일 뿐이다. 이미 '여순 반란 사건'이라는 용어는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물론, '여순 항쟁'이라는 표현도 공식적 용어는 아니다. 항쟁으로 부르든, 반란으로 고집하든 각자의 역사의식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징표일 뿐이다. 진상규명 요구는커녕 희생자의 유족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야만적 사회의 후과다.
진상규명을 요구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다. 당시 직접 피해를 당한 이들은 물론, 그들의 유족조차 거의 세상을 떠났다. 진상규명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로부터 합당한 배상을 받을 대상자가 없는 셈이다. 동서고금에 시간은 늘 권력과 악의 편이다.
결국 무색무취한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낙착됐다. '여수 순천 10.19 사건'이라는 말을 줄여 '여순 사건'으로 부르는 게 보편적이다. 지난 2021년 천신만고 끝에 제정된 <여순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에서도 '여순 사건'으로 공식 명명됐다.
어렵사리 특별법이 마련됐지만, 추념일인 10월 19일 하루를 제외하곤 '여순 사건'에 대한 관심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당장 이해타산에 매몰된 정치권과 부박한 여론을 핑계 대지만, 애초 '사건'으로 명명되면서부터 예견됐던 터다. '정명(正名)'의 중요성을 간과한 셈이다.
'여순 사건'과 구례
지난 주말 '여순 사건'을 주제로 아이들과 함께 지리산 자락인 전남 구례로 답사를 다녀왔다. 당장 질문이 터져 나왔다. 왜 여수와 순천이 아닌, 뜬금없이 구례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들에게 '여순 사건'은 그 이름대로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여순 사건'이 전개된 지역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를 중심으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여러 시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이름이 여수와 순천으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사건의 경과와 규모를 축소해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여순 사건'을 민간인 학살로 점철된 전쟁과 분단의 실질적 방아쇠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여순 사건'은 지금까지도 온 국민의 사상과 양심을 옥죄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직접적 계기였다.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섬'으로 낙인찍어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도, 6.25 전쟁 당시 재판 절차도 없이 국민보도연맹 집단 처형을 자행한 것도 '여순 사건'에 대한 보복 성격이 강하다. 10.19라는 날짜와 여수, 순천이라는 지역으로 한정될 사건이 아니란 이야기다.
전남 구례엔 시쳇말로 발에 치이는 게 '여순 사건' 유적지이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다. 곳곳에 관광객이 북적인 주말이었는데도, 아이들과 함께 찾아간 곳마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조차 없었다. 관련 유적지임을 소개하는 안내판은 세워져 있으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읍내의 봉성산 자락에 조성한 현충공원은 '여순 사건' 유적지라고 하기엔 성격이 애매하다. 6.25 전쟁 전후 전사한 국군과 경찰을 기리는 충혼탑과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거칠게 말해서, '죽인'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같은 곳에서 위령하고 있는 셈이다.
현충공원이 자리한 뒤편 봉성산에는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무덤이 있는데, 굳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이들의 동상을 앞세운 건 어색하기 짝이 없다. 형태도 위치도 상생과 화해의 의미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뚱맞다.
나란히 세워지게 된 사연을 알고나니 더 가슴이 저민다.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는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된 서시천 변 공원에 서 있었다. 무심한 세월 속에 위령비를 찾는 발길이 끊기며 관리조차 힘들게 되자 고령의 유족들이 충혼탑과의 '더부살이'를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는 유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위령비마저 버려질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명절날 옆 봉분 벌초하듯 충혼탑을 관리할 때 한 번 봐달라는 뜻이다. 그래선지 충혼탑이 우뚝한 자리보다 한 계단 낮은 자리에 마치 임금을 알현하듯 멀찍이 세워져 있다.
지리산 온천 마을 초입에 선 '백인기 대령 추모비' 주변에는 여전히 '여순 반란 사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이곳에 주둔하던 토벌대의 연대장으로, 지휘관 회의 참석차 부하 2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공비들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현충 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지금이야 봄마다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온천 휴양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은 당시 주민 대다수가 '반란군'의 부역자로 내몰려 집단 학살당한 참혹한 현장이었다. 토벌대에 의해 '대살(代殺)'까지 자행되며 마을 공동체가 풍비박산났다. 이곳의 붉은 산수유 열매에서 그들의 피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추모비 옆 그의 행적을 적은 안내판엔 '여순 사건'이라고 적힌 어설픈 테이프 자국이 보인다. 반투명이어서 그 아래로 '여순 반란 사건'이라는 단어가 또렷이 비친다. '여순 반란 사건'이 '여순 사건'으로 공식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나름 소중한 교육 자료인 셈이다.
'반란'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하는 데 반백 년 넘는 세월이 걸렸지만, 인식 속에서 깨끗이 지워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추모비 인근 마을의 내력을 적어놓은 비석에는 '여순 반란 사건'으로 적고 있다. 그곳 어르신들도 익숙한 듯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불렀다.
사랑 구호에 가리워진 역사
지리산 온천 지구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산수유 사랑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산수유 문화관과 전망대까지 갖춘 이곳은 봄철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중심 무대다. 노란 산수유꽃이 장관을 이루며 해마다 전국의 수십만 인파를 끌어모으는, 구례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이곳의 테마는 오로지 '사랑'이다. 산수유의 꽃말이 '영원불멸의 사랑'이라는 이유에서다. 가는 길마다 하트 모양 시설물을 설치해 두었고, 곳곳을 알파벳 'LOVE' 조형물과 아프로디테의 화살로 치장했다. 심지어 옛 유행가의 노랫말을 모티프로 한 '사랑의 미로'까지 세워 놓았다.
이곳이 '여순 사건'의 참혹한 현장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념물이 아예 없진 않다. 울긋불긋 요란한 하트 조형물 사이에 '산동애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산동애가'는 '여순 사건' 당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를 대신해 학살당한 열아홉 살 백부전(백순례)의 한을 품은 노래다.
공원 내에 아무런 표지가 없어 관광객들은 이 노래비가 '여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나간다. 설명하기 전까지 아이들도 필기체로 흘려 쓴 이 비가 어느 시인의 사랑 노래인 줄 알았다고 했다. '사랑이 넘치는' 그곳에 '여순 사건'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압권은 산책로에 세워놓은 이원규 시인의 나무 시비가 통째로 뽑혀 내팽개쳐진 모습이다. 그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은 이곳의 몇 남지 않은 '여순 사건'의 안내판 구실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시비 앞에서 가수 안치환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함께 들을 요량이었다.
시비가 무참하게 뽑힌 그 자리에 알파벳 'LOVE' 조형물이 새뜻하게 세워졌다.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관광객은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산동애가' 노래비가 바윗돌이 아니었다면, 그것 역시 무탈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안타깝다 못해 당혹스러웠다.
연유를 알고 싶어 부러 지방자치단체에 전화를 걸었다. 부서 담당자는 시비가 뽑히고 새 조형물이 세워진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사소해 보이는 시비 하나에도 기억해야 할 역사가 담겨 있고, 그로 인한 교훈에 감화되어 성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선 곤란하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눈물겨운 노력에 몽니 부릴 일은 아니다. 다만,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을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붉은 산수유와 핏빛 '여순 사건'이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