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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시민들의 인내가 바닥났다. 우리 진보 정치권은 시민들의 이런 '심리적 탄핵'이라는 바탕 위에서 '법률적 탄핵'이든 '임기 단축 개헌'이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이 정권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시민들의 윤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아직 2016년 겨울 같은 거리의 열기로 모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탄핵 이후'든 '하야 이후'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일 터다. 시민들은 이제 그냥 대통령 한 사람 바꾼다고 나라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어서이리라.

대한민국입시정부요원 임시의정원 의원의 신년축하기념 사진
대한민국입시정부요원임시의정원 의원의 신년축하기념 사진 ⓒ 독립기념관제공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이란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긴박한 정세 대응과 더불어, 말하자면 근본으로 돌아가서, 차분하게 이 나라의 나라다움을 어디서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고민이, 새삼스러울지라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고유한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 지금 이 나라의 상태를 진단하고 평가하는 준거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떻게 더 나라답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실천적 지침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매우 복잡한 작업일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는 우선 그 역사적 기원을 돌아보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어떤 서구적 이념이 우리 땅에 이식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 선조들은 유교적 대동(大同) 세상을 위한 '공동선의 정치'에 대한 지향 속에서 오랫동안 나름의 공화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세상은 모두의 것이다)'이라는 유교적 공화주의 이념은 조선 시대 이래 모든 정치의 핵심 지향이었으며, 성리학적 왕조 체제 또한 왕과 사대부의 공동 통치를 뜻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구현한 모종의 원형적 공화정 체제였다.

이런 배경 위에서 구한말에는, 서구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나름의 내적 기반 위에서, 일종의 입헌군주제로서의 '군민공치(君民共治)'라는 헌정적 이상도 발전시켰다. 이후 '동학혁명'을 통해 주체적 역량을 쌓고 입증해 왔던 한반도의 인민들은 순종이 국권을 포기하자 스스로 주권을 계승하여 이 땅의 주권자가 되었다는 뚜렷한 자각 위에서 '3.1 혁명'을 통해 민주적 시민으로 떨쳐 일어섰으며, 바로 그 바탕 위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민주공화국의 건립을 선포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무슨 역사적 곡예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오랜 문화적, 정치적 축적의 결과물이다. 물론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은 서구의 정치적 발전 과정에 빚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헌법적 문헌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데, 이는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뚜렷한 역사적 자각 위에서 복국(復國) 이후 새롭게 건설될 나라의 근본 방향이 민주주의라는 기초 위에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공동선을 추구하는 '모두의 나라'로서의 공화국이어야 함을 선포했다.

나아가 이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추구했던 이들의 정치철학, 곧 '민주적 공화주의'도 서구의 공화주의 전통과는 다른 나름의 고유한 결을 지니고 있다. 서구의 공화주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비-지배(non-domination) 자유'에 대한 지향을 핵심으로 한다. 이 자유 개념은 단순한 '불간섭'을 의미했던 자유주의와는 다르게, 노예적 피지배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우리 민족 전체의 집단적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독립 운동 전체는 바로 이런 의미의 자유 개념을 실천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에서 그런 자유 개념의 이론화는 나름의 고유한 색깔을 띠고 나타났다.

임시정부 이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삼균주의(三均主義)'

상하이 임시정부 이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던 조소앙 선생은 그런 자유의 이념을 유교 전통은 물론 우리 민족의 단군 신화와도 깊이 맞닿아 있는 '삼균주의'를 통해 표현했다. 이것은 나라 안으로는 모든 구성원들의 정치, 경제, 교육 상의 균등을 추구했고, 나라 밖으로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을 추구했다. 조소앙 선생은 이 삼균주의가 바탕하고 있는 '균(均)'의 이념이, 부족함보다는 고르지 못함을 걱정했던 공자 이래 유교 전통의 영향일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균형(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을 지향했다는 단군 시대의 국가 이상도 잇는 것으로 이해했다.

제헌헌법 이래 현행 헌법에도 녹아 있는 이 삼균주의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을 노예 상태로 만든 일본의 억압적 정치체제를 극복하고 모든 시민이 평등한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했던 우리 고유의 민주적 공화주의 정치철학이었다. 여기서 모든 시민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와 교육 기회를 향유하고 실질적인 물질적 독립 상태를 누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이해된다. 이 삼균주의는 비-지배 자유의 이상에 초점을 둔 오늘날의 '신공화주의'를 포함하여 서구 공화주의 전통의 핵심 지향과 완전히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의 자유와 존엄의 실질적 토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나름의 고유한 초점을 가진 새로운 민주적 공화주의 정치철학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의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역사성을 왜곡하는 일

윤석열 대통령이 의지하고 있는 뉴라이트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삼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바로 이런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 의도의 핵심은 결국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을 곡해된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로 왜소화하는 데 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참된 천하위공의 공동선을 실현하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오랜 노력과 투쟁의 바탕 위에서 건국되었고, 지금도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윤석열 이후'를 위한 싸움도 바로 이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님입니다. 이 글은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민주공화국#삼균주의#임시정부#건국절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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