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기자말] |
외국 여행을 할 때 한국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편리하고 깨끗한 공중화장실이 절실히 그립다. 꼭 필요하다 싶은 위치에 제대로 있는 잘 관리된 청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무료인 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는 나라 밖으로 나와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세계 어디에서나, 공중화장실 사용은 큰 도전이다. 어쩌다 공중화장실을 만나도 어둡고 비위생적이고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내게 여전히 잊히지 않는 화장실은 30여 년 전 중국에서 맞은 화장실 풍경이었다. 길고 투박한 건물에 칸막이 하나 없이 바닥 판자에 구멍만 규칙적으로 뚫린 풍경은 가히 충격이었다.
문화적으로 성숙한 곳으로 여기는 서유럽이나 북미에서도 화장실 이용을 위해 느낀 절박함이나 참담함은 한두 번이 아니다. 공중화장실을 찾기 어렵고, 긴급 상황에는 화장실 사용만을 위해서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꽃향기가 먼저 반기는 브라이언트 공원
미국 맨해튼에서도 우리 부부는 화장실 이용 문제로 곤란을 겪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지냈다.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에서 공중화장실이 눈에 띄자 예의 유비무환의 마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발을 들여놓자 커다란 꽃꽂이의 꽃향기가 먼저 반겼다. 인공향인가 싶어 꽃을 다시 살폈지만 생화였다.
오른쪽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자 음악감상실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싶은 클래식 음악이 마음을 다독였다. 세면기 앞에는 고혹적인 난이 꽃을 피우고 있다. 수전, 도기, 타일, 격자천장, 크라운 몰딩이 호화로움을 더했다.
벽에 걸린 그림은 Susan Weintraub 화가의 2015년 작품, '분수'였다. 갤러리처럼 이 그림의 상세 설명이 붙어있었다.
"종이에 수채화. 브라이언트 파크 아트 컬렉션. 2015년 Bryant Park Painter in Residence 프로그램에서 예술가들에게 2주 동안 표현해 줄 에어(en plein air 야외에서)의 Bryant Park의 이미지를 표현해 줄 것을 의뢰했다. 이 그림은 수전 와인트라웁의 공원에 대한 시각적 기록이다."
5성급 호텔의 화장실도 이처럼 잘 관리되기는 어렵지 싶었다. 화장실을 나와서 다시 화장실 건축을 살폈다. 보자르(Beaux-Arts) 대리석 건축의 품위는 호화로운 화장실의 디자인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남녀 화장실에 남녀 두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었다.
남자 화장실 관리인, 리암씨에게 이 공공화장실과 관련된 의문들에 대해 질문했다. 짧은 질의응답이 오갔다.
- 안녕하세요. 이 꽃꽂이는 누가 디스플레이하나요?
"전문 업체에서 매주 월요일 방문해 꽃을 새롭게 교체합니다."
- 이 음악은 어디에서 컨트롤하고 플레이리스트는 누가 만드나요?
"여자화장실 오디오 박스가 있습니다. 선곡된 곡이 자동으로 플레이되고 음악은 화장실의 개장과 폐장에 맞추어 자동으로 켜지고 꺼집니다."
- 이 화장실은 24시간 개방되는 것은 아니군요?
"아침 8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닫습니다."
- 이 화장실이 이처럼 관리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할 듯하네요?
"상세한 운영비용은 제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모습은 2017년 진행된 업그레이드 개조 공사의 결과입니다. 그 당시 30만 달러의 비용을 들였습니다."
- 뉴욕시에서 그렇게 많은 예산을 이 화장실에 배정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 공원은 시에서 위탁한 비영리단체인 브라이언트 파크 코퍼레이션(Bryant Park Corporation)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후원이나 이곳의 여러 부스 운영, 이벤트 등으로 비용을 조달합니다. 현재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가 주요 후원사로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공원관리는 비영리단체에 위탁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와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 등 뉴욕시 전역의 공원, 운동장 및 레크리에이션 시설은 시의 관리부서(New York City Department of Parks and Recreation, NYC Parks)에서 관리한다.
하지만 브라이언트 공원은 1980년에 설립된 민간 비영리 단체인 브라이언트 파크 코퍼레이션에 공원의 관리와 활성화를 맡겼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경영은 시 예산만으로는 불가능한 결과를 민관 파트너십으로, 즉 향상된 관리와 다채로운 프로그램의 진행으로 시의 공공 공간이 자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이다(시는 소유권과 감독권을 유지하고 브라이언트 파크 코퍼레이션은 운영, 유지 관리 및 프로그래밍 기획).
1970년대 시의 유지관리가 미흡해 마약 사용자들이 몰려드는 본거지로 불렸다는 이곳,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시민들을 위한 무료 브로드웨이 쇼 공연(Broadway in Bryant Park), 클래식 영화 상영(HBO Film Festival), 재즈 페스티벌(HBO Film Festival), 점심 콘서트(Lunchtime Concerts), 시 낭독회, 작가와의 만남, 논픽션 도서 토론회, 글쓰기 워크숍, 요가수업, 체스 및 보드게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뉴욕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생활을 증진하는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10월 말부터 내년 3월 초까지 진행되는 '윈터 빌리지(Bank of America Winter Village at Bryant Park)' 준비가 한창이다. 무료 입장 아이스 스케이트장이 개장되고 다양한 먹거리와 공예품, 선물들을 파는 디자인 키오스크와 상점이 문을 여는 '윈터 빌리지'는 이 공원을 뉴욕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겨울 명소로 만들었다.
다시 화장실 얘기로 되돌아가면, 시민 모두를 위한 이 호화로운 무료 화장실은 민관 상생 아이디어의 결과였던 셈이다. 시가 비영리단체에게 공원 운영을 맡기고 그 단체는 기업들을 설득해 기부를 이끌어내고, 기업은 공원을 이용하는 뉴요커와 관광객 모두에게 브랜드를 노출하는 식으로 말이다.
시민들의 화장실 이용은 '긴급한 의료문제'이자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시 곳곳에서 잘 정비된 공공화장실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그날의 행운이 따라야만 하는 문제다.
이날 내 경우 또한 맨해튼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러움을 화장실을 통해서 경험한 날에 속했다. 쇼킹했던 오래 전의 중국 화장실과는 또 다른 이유로, 아마 내 기억에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화장실로 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