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을 유지·발전시키고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이다.
이 연재는 충청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다. 그들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한다. |
여당 야당도 아닌, 그냥 무당이로소이다
굿판에선 신(神)과 인간이 공명하게 삶과 죽음을 가슴으로 껴안습니다. 때론 간절하게, 때론 애틋하게 넋을 달래고 위로하며 화해와 용서를 시키는 것이 굿입니다.
신의 전령사로 살아온 저는 여당 야당도 아닌, 그냥 무당이로소이다. 지난 2000년, 계룡산 산신 동자암 무속인 저 최설희는 국내 유일의 당산 무속인으로 입신 '작두굿' 명인이 됐습니다.
사회적 통념상 과거 '무당'이라고 하면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최근에는 무당 100만 명 시대가 될 정도로 무속인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한마디로 '무당춘추전국시대'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기존 방송사뿐 아니라 유튜브를 비롯한 예능 관련 콘텐츠에서도 무속인들이 점술가로 출연하며 예언하고 적중하면서, 대중적인 관심이 한층 높아지게 됐습니다.
각자의 걱정 근심과 불안감, 우울증 등이 수면 위로 오르면서 화제의 인물이 된 무속인. 전문가 말에 따르면, 한자 모양 그대로 땅에 사는 사람을 하늘과 이어주면서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을 수련해 온 굿이라는 전통 예술을 펼치는 행위자를 무속인이라고 합니다.
운동선수가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 하면 실력이 줄기 마련이듯 무속인들 역시 끊임없이 자기 수양과 수련을 해야만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무속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원천입니다. 무(巫)는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인 동시에 선조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 담긴 사상이며, 가(歌)와 무(舞) 그리고 재담이 결합한 종합예술입니다.
신의 제자...'나랏굿'으로 헌신과 봉사 실천
처음 신내림을 받은 2000년 5월 17일. 그로부터 24년을 '신의 제자'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작두는 2003년에 처음 탔습니다. 그때부터 '나랏굿'을 통한 공동체 헌신과 봉사를 실천해 왔습니다. '나랏굿'은 곧 애국애족의 혼이 깃든 것이며, 주변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대한민국 무속 부문 작두 명인 1호인 저는 2010년 몽골 칭기즈칸 추모제 참가를 시작으로 독일 한독 수교 130주년 파독 광부 50주년 진혼제, 대만 진국사 세계 불교 우호 대회 한국 대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 독립운동가 추모제, 중국 백두산(장백산) 통일기원대제,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행사 원폭 희생자 추모제와 원폭 한국인 위령제 등 다수의 나라굿을 지냈습니다.
무속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전통 예술의 맥을 이어간다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무속인들의 질적 삶에도 기여하겠습니다.
어린시절 친구는 '고독'
무당의 삶을 글로 쓰려니 자꾸 망설이게 되고, 소리 없는 눈물이 제 볼을 타고 흐릅니다. 저는 충남 서천군 서천읍 동산리 472번지에서 가난한 농부 아버지 최제남, 어머니 조순애 사이에 2남 2녀 중 늦둥이 막내딸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막내였는데도 부모님의 사랑이 뭔지, 남매의 정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어린 시절, 가난은 결코 죄는 아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입니다.
기독교 집안 딸, 무속인이 되다
친정어머니가 권사님, 오빠는 장로님이셨는데 불교 집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시부모님을 모시며 슬하에 3형제를 낳았습니다. 처음 점집을 찾은 것은 360평 규모의 식당 운영을 위해 남편과 시댁 식구들 손에 이끌려서입니다.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몸이 아프더니 자주 입원하게 됐고, 의사 선생님께서 환자의 몸이 나을 기미가 없자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밑져봐야 본전이다. 굿을 한번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점집을 찾게 됐고, 그곳에서 무당이나 하라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무당 하라는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정말 신기가 있나' 하는 무서움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눈물과 함께 보냈습니다.
하루하루 몸이 너무 아팠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손님들을 보면 말이 툭툭 튀어나와 하루도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신을 받고 굿을 하면서 무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뒤늦게 안 사실은, 친정 당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큰 만신으로 불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저의 삶은, 집안의 대를 이어 무녀의 길로 가야 할 운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대가 작다, 큰 무대로 가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 동안 계룡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령님께서 제 몸에 실리더니 "아가, 여기는 무대가 작다. 큰 무대로 가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때부터 독일, 대만, 일본 등을 다니면서 나랏굿에 들어가게 됐고, 평소보다 더 자신감이 붙게 됐습니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굿은 '파독 광부 간호사 진우제'였습니다. 제 몸에 실린 분은 외화벌이를 위해 가난한 나라의 간호사들이 덩치 큰 그 나라 환자들을 간병하다가 겁탈당한 적도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통역은 아이러니하게도 선교사님이 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사란 말에 제가 주춤해하며 '이분이 과연 내 통역을 제대로 해줄까' 싶었습니다. 염려된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한인 2세였던 선교사님께 제 마음을 얘기했습니다.
"사실 저도 기독교를 다녔던 사람인데 신의 부름을 받고 이 길을 가게 됐다. 그런데 제가 기도를 해보니 하늘에는 하느님이든 옥황상제님이든 두 분이 같은 분이시더라. 인간들이 찢어놓은 거지, 주인은 하나더라. 한국에서는 (굿) 이게 민간 신앙인데도 지금은 기독교 문화가 활발히 퍼져있어 무속인 하면 거리감을 둔다. 선교사님께서는 제가 하는 이 행위를 보며 통역을 할 수 있겠나?"
놀랍게도 그 선교사분의 첫마디가 "어때요? 우리 아버지 나라의 문화인데." 얼마나 놀랍고 고마웠든지. 그때 '지금 내가 무속인의 길을 간다고 스스로 나를 창피해했구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을 바꾸면서 민간신앙을 살리기 위해 더 자신있게 제 길을 가게 됐습니다.
식당 운영은 허기진 배 채워주는 일
민간 신앙들은 다 점을 보고 살았습니다. 선조님들이 말한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올 거야' 이런 것이 바로 점입니다.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도 신령님들이 먼저 와서 '누가 어떻게 된다'고 미리 얘기를 해주는 겁니다. 이처럼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은 점을 보라고 신령이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점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온 신령님은 "아가, 나는 돈 버는 재주는 없다. 돈은 네가 벌어라. 그 대신 집안은 평탄하게 해주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도 발언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라 믿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지금까지 식당과 굿, 투잡을 합니다. 굿은 점이 목적이 아닙니다. 돈 없어서 굿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꼭 굿을 해야만 잘 되는 건 아닙니다. 잘될 것 같으면 대한민국에 못 살 사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식당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면 제일 좋아합니다. 일하다가도 배고프면 저에게 돈을 주고 밥을 사 먹습니다. 어찌 됐든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식당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모범적인 무당의 삶'이 꿈
지금 제 남편은 무녀가 된 저를 헌신적으로 내조합니다. 주위에서는 우리 부부를 두고 키다리 잉꼬부부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남편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마음 넉넉한 무당'이 되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함께 봉사활동 하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 당시 단독으로 전달할 우리 민족의 색, 오색 팔찌를 3000개 제작하여 전달했습니다. 아울러 목도리 뜨기 재능기부 등 다양한 봉사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후원을 받지 않고, 오직 제힘으로 공연합니다. 돈만 바라보고 무속인 생활을 한다면 제 돈 써가면서 이런 공연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무당도 지역을 위해서 일을 하는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무속인에 대한 시선도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마주하면서 때론 어렵고, 힘들고, 괴롭고, 아픈 순간을 끌어안으며 소통하고, 다독이고, 위안을 해주면서 중생 구제 하라는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난 무속인입니다.
무속인은 신의 전령사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중개사이기도 합니다. 신이 내려주는 말씀 그대로 전달하고 소통하는 것이 무당의 임무인 동시에 무당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치를 깨쳐 널리 알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천지인 합일 사상을 실천하며 무의 명인으로 모범적인 무당의 삶을 살아가는 게 저의 꿈입니다. 헌신하며 살라는 큰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