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는 수능이 400점 만점이었다. 요즘처럼 등급이 아닌 점수로 모든 게 판가름 났다. 소위 수능시험 한번 잘 치르면 원하는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입시가 지금보다 단순했기에 그냥 신경 끄고 열심히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수능 시험을 말아먹었다. 다른 과목은 평소랑 비슷하게 나왔는데 당시에는 언어영역이었던 국어에서 무려 30점이나 낮은 점수를 받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국어에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점수를 가장 중요한 수능에서 기록해 버렸다.
국어는 제일 믿었던 과목이라 충격이 더 컸다. 다른 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점수를 안겨주던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어느 정도 이상의 점수대를 유지했었다.
이렇게 말하니 공부를 꽤 잘했던 것 같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대충 반에서 중간 정도 가는 성적이었다. 최소한 모의고사 점수 정도는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수능을 죽 쑤다니. 그것도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보니 배신감과 실망감이 컸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또 있을까? 국어 점수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일 못하는 수학을 망쳐 버린 것도 아니고 국어를 망치다니. 첫 시간이어서 긴장을 했던 걸까? 아니면 답을 밀려 쓰기라도 한 걸까?
어차피 결과는 바꿀 수가 없다. 아무리 후회하고 원망해 봐야 스트레스만 될 뿐이다. 실망한 부모님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를 제일 힘들게 했건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독할 만큼 패배 의식에 젖어 살기 시작한 것이.
늘 남과 나를 비교하며 끝없는 열패감에 빠져 허우적댔다.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그런데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무뎌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뿐만 아니라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이 꼭 내 의지대로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수능 시험 이후로 내 인생은 크고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숱한 실패는 내 마음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긍정적 의미에서의 균열이었다. 내 안에 가득한 열등감과 패배 의식을 하나둘씩 깨부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의 경험보다 또 다른 실패의 경험들이 나를 치유해 주고 점점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은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굳은살로 남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만고의 진리는 나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시간은 정말 좋은 약이 되었다. 잘하지 못해도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수능 시험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실수나 좌절, 아쉬운 일들 중의 하나였다. 그저 하나의 실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은 삶에 더 많은 기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포기하지 않고 준비한다면 인생의 전환점은 또다시 나를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꾸준히 실패하고 있지만 예전보다 두려움은 덜하다. 다른 기회가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믿음은 나로부터 발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나를 열등감과 패배 의식에서 꺼내준 건, 주변 사람들이었다. 아내, 친구, 가족들이 해주는 따뜻한 지지와 응원이 그러하다. 나를 도구가 아닌 존재로서 바라봐 주는 그들의 시선이 나를 구원해 주었다.
지금 시점에서 아쉬운 부분은 수능 성적표를 받았던 날 어른들이 보인 반응이다. 그때 나에게 혹독한 비난 대신 위로와 공감을 해주었다면 아마 조금 더 빨리 실패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열아홉 살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괜찮으니 속상해하지 말라고. 앞으로 더 많은 기회들이 찾아올 테니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하며 꼬옥 안아주고 싶다.
오늘은 50만 명 넘는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보통은 수능 한파라고 해서 시험 당일 유독 추운 날들이 많았다. 다행히 올해는 큰 추위는 없을 거라고 한다.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이 무사히 시험을 잘 치렀으면 좋겠다.
공부하느라 고생한 수험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고. 설령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더라도 절대 낙심하지 말라고 말이다. 열아홉 살의 나에게 찾아가해주고 싶었던 그 말을 오늘 날씨처럼 포근한 위로와 공감을 담아 수험생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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