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5일 의열단 김종철(金鍾喆) 지사를 기리는 공적비가 경북 경주시 양북면 복지회관에 세워졌다. 그가 타계한 1941년을 기준으로 치면 78년 만의 일이다. 의열단으로 활동했던 치열한 독립운동가 공적비 하나를 세우는 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관련 기사:
경주 유일 의열단원 김종철 지사 공적비 건립... 15일 제막식 https://omn.kr/1lmok ).
김 지사는 1888년 12월 12일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45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월일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31세이던 1919년 3.1독립운동을 겪은 후 만주로 망명해 송두환·최해규 등과 함께 임시정부 산하 조직인 의용단(義勇團)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 중 군자금 모금차 밀입국
그후 군자금 모금차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12월 6일 김봉규와 함께 경남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때 합천 부호 정달락, 의령 부호 남정구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가 남정구의 계략에 빠져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연행돼 가던 중 일본인 순사 갑비(甲斐)를 사살하고 조선인 순사 손기수(孫騏秀)에게 중상을 입히고 만주로 탈출했다. 그후 상해로 가서 김원봉·이종암 등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해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사망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도 확인되고 있지 않(독립기념관 독립운동 인명사전)"는 상태에 놓여 있다. 고향에 공적비가 2019년 11월 15일 건립됐지만 (그로부터 5년 가까이 경과한 2024년 11월 15일 현재까지도)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는 밀양 의열기념관만 소개하고 있다.
사망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없는 의열단원
김종철 지사 관련 많이 알려진 일화인 '갑비 사건'을 독자들에게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그를 조금이나마 더 현창하려 한다. 시점은 의열단 이종암이 경남 밀양에 잠입해 최수봉 지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추진하고 있던 1920년 12월이다(기자 주).
12월 8일 경남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에서 일본 순사 가이(甲斐)가 살해당했다. 관헌 500명이 범인 색출에 동원된 경남 서부 지역은 그 사건으로 난리법석이라는 소식이 밀양까지 전해졌다.
"가이를 처단한 의사가 의열단 단원이오?"
최수봉이 그렇게 물었을 때 이종암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오. 의열단 계획에 의령 순사 가이를 처단한다는 것은 세워진 바 없었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일본 순사를 권총으로 처단했다는 소문을 보면 그는 틀림없이 독립지사요. 아마도 머잖아 의열단으로 찾아올 겁니다. 그보다도 지금은 우리에게 때가 왔다는 것이오. 경남 경찰들이 의령에 잔뜩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니 그만큼 밀양 경찰서는 허술해질 것이 틀림없소. 거사일을 확정해야겠소."
논의 끝에 12월 27일을 밀양경찰서 거사 날짜를 잡았다. 월요일인 27일을 거사일로 확정한 것은 최수봉이 정보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밀양 경찰서는 월요일 아침에 조회를 연다 하오. 와다나베 스에지로(渡邊末次郞)가 서원들에게 일장 훈시를 한다니, 그렇다면 한 자리에 서장 이하 순사놈들이 집합해 있다는 것 아니오? 투탄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오."
최수봉은 거사일이 정해진 이후에도 계속 의령 거사를 일으킨 의사가 누구인지에 대해 자꾸 관심을 보였다. 본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밀양 경찰서에 투탄을 하러 갈 실행자였기에 특별히 더 마음이 쏠렸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의열단 본부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종암의 말대로 가이를 처단한 의사가 의열단으로 찾아왔던 까닭이다. 가이 처단 '범인'이 누구인지 일제 경찰이 알게 된 것은 사건 발생 이후 3년이나 지난 1923년 11월 3일이었다. 하지만 의열단은 불과 며칠 만에 전모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의열단을 찾아온 의사는 김종철이었다. 그는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투탄 거사 직후인 9월 중순, 경북 월성의 고향 후배 김봉규와 함께 경남 합천군 삼백면 우조리에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은 대구 신암동 출신으로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군자금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던 송두환의 지침에 따라 활동 중이었다.
그 무렵 두 사람의 손에는 '사형 집행장'이 들려 있었다. 사형 집행장은 독립운동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처형해도 좋다는 임시정부의 공식 문서였다. 두 사람이 우조리의 정달락을 방문해 찾아온 이유를 말하니 그는 선선히 의연금을 내놨다. 사형 집행장까지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의 남정구를 만났을 때는 경과가 영 달랐다. 김종철이 '1만 원을 군자금으로 기부하시오'라고 하자 남정구는 '그렇지 않아도 누구를 통하면 독립지사들에게 의연금을 낼 수 있는지 나름껏 수소문 중이었소. 이렇게 만났으니 그 수고로움은 벗어나게 됐구료. 다만 지금 당장 1만 원이라는 거금이 수중에 있는 것은 아니니 예서 조금 기다리시면 내가 백방으로 뛰어 그 돈을 마련해 오리다' 하면서 흔쾌하게 나왔다. 남정구는 술상까지 차렸다.
두 사람이 방심을 한 사이 남정구는 뒤로 머슴을 시켜 '화적이 나타났다'고 의령 주재소에 고발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채 느긋하게 정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순사들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꼼짝 마라! 일어나서 두 손 치켜들어!"
가이가 총을 겨눈 채 두 사람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가이와 마주보는 형세로 앉아 있던 김봉규부터 자리에서 일어섰다. 끌려갈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때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김종철은 가이의 목소리만 들릴 뿐 그 자의 몸놀림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가이도 마찬가지였다.
"앉아 있는 놈도 일어서서 밖으로 나오지 못해!"
가이가 소리쳤다.
"알겠소."
대답을 하면서 김종철은 슬그머니 권총을 꺼내들었다. 김봉규가 눈치껏 반응을 보였는데,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다는 표시였다.
김봉규의 눈빛을 확인한 김종철은 벽력같이 몸을 돌려 가이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실전 경험이 없었던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가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종철은 놀라 허둥대는 조선인 순사 손기수에게도 한 발을 발사했다. 손기수가 워낙 몸을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표적이 심하게 흔들려 총알은 명중되지 못했다. 부상을 입은 손기수는 기다가, 뛰다가 하면서 줄행랑을 쳤다.
두 사람은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들어선 다음 헤어졌다. 김봉규는 국내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펼칠 마음이었으므로 결과 보고도 할 겸 송두환에게 갔다. 김종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김봉규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중국에 가서 의열단에 가입할 것이야. 다음에 또 만나세."
(3년쯤 지난 1923년 11월 3일, 송두환과 함께 활동해오던 최윤동과 이수영이 팔공산 아래 송림사에서 체포되면서 가이 사건의 전모가 일제 경찰에 알려졌다. 그때 김봉규도 체포되어 4년 감옥살이를 겪게 되었다. - 기자 주)
김종철은 일제의 수사망을 벗어나 상해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제 경찰은 500명이나 되는 수사 병력을 경남 서부 지역 일원에 배치했지만, 김종철은 이미 경남을 벗어나 신의주행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김종철이 탄 기차는 밀양도 지나갔다. 일제 경찰은 의령 주변의 경남 서부 지역 일대를 수색할 뿐 동부인 밀양까지는 검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양 경찰서의 순사들 일부까지 경남 서부 지역으로 차출해갔다. 덕분에 김종철이 탈출하기에도 좋아졌고, 이종암 등이 거사를 추진하기에도 여건이 좋아졌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