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주일 안팎으로 우환이 겹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심란한 생각이 길어지고 기분도 우울해진다. 부창부수인가. 아내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희로애락도 알게 모르게 전이되는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아내가 시장에서 무 5개를 사 왔다. 요즘 맛있는 무로 깍두기를 만드나 여겼다. 그리고 다음 날 주말,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마트 쇼핑에 나섰다. 아내는 마트 물건이 싱싱하게 보인다며 무 5개를 또 샀다. 알타리무(총각무) 3단도 카트에 담았다. 아내가 무 김치와 알타리무 김치를 직접 만들 요량이었다.
나는 아내를 보면서 "지금 무리하지 말고 배춧값이 계속 떨어지면 나중에 김장을 담그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내는 벌써 결심을 굳힌 듯 집에 오자마자 무를 절이려고 했다. 내가 김치를 만들지 말라고 만류하는 건 아내가 손목의 '건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기 때문이다. 무리하면 손목이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나름 절충안을 제시했다. 내가 씻고 다듬어 모든 재료를 준비할 테니 아내는 절이는 것과 김치 양념장을 천천히 만들어보라고 했다. 소금에 절이는 것과 양념장은 아내의 기술과 판단이 있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맡겼다.
어제 일요일 아침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무와 알타리의 흙과 잔뿌리를 제거하고 무는 크게 자르고 알타리무는 먹기 좋게 네 조각으로 잘랐다. 이어 소금을 뿌리고 몇 번 뒤집으면서 절이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양념을 버무리고 두 김치를 만드는데 도합 반나절 걸렸나 싶다.
예전 같으면 아내 혼자서도 뚝딱 해치웠을 김치를 오늘은 내가 도와 가까스로 만들었다. 아내가 모처럼 김치 작업을 지휘했다. 그것도 하루에 두 가지 무 김치를 담근 것이다. 이런 경우는 거의 처음이다.
아내는 이내 손목이 아프고 저린지 방에 들어가 쉬겠다고 했다. 이제 남은 건 청소, 아내의 점검이 있기 전에 남은 쓰레기를 처리하고 설거지까지 마무리 지었다.
알타리무는 지금 맛이 좋다. 무김치에는 사골과 사이다로 만든 육수가 들어가 삭은 무는 무대로 먹고, 여기서 나오는 국물로는 '김치말이국수'가 탄생할 것이다. 김치말이국수는 막내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다.
버무린 김치들을 용기에 담아 냉장고 한 켠에 두고 바라보니 왠지 흐뭇하고 보람이 있다. 미루었던 숙제를 해치우고 개운한 기분이랄까.
요새는 김치를 거의 사 먹는다. 추세도 그렇지만 내가 아프고 아내 또한 시간에 쫓겨 김치를 담그질 않았다. 몇 년째 김장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내가 먼저 사 먹자고 했다. 처음에는 파는 김치가 입에 맞지 않더니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아내가 만든 김치가 역시 최고다. 아내가 어쩌다 김치를 담그거나 겉절이를 하면 아내 솜씨를 추켜세우며 맛보기 바빴다. 마음이 괴로우면 모든 게 귀찮을 법한테 아내가 몸이 불편한데도 기지를 발휘해 김치를 한 것이다. 생전의 어머니도 뭔가 속상한 일이 있으면 김치나 반찬을 만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심리적인 충격으로 생기는 침울한 분위기를 잊기 위해 '기분전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노력할 생각이다. 전문가들도 우울증에는 긍정적인 생각과 생활이 '회복탄력성'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아직도 침울한 기분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두 김치가 익어 먹을 즈음엔 모든 시름과 걱정도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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