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과학이 발전하면서 꿈꾸던 유토피아의 세계가 과연 진정한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그렇게 부정하고자 했던 디스토피아의 다른 이름인가에 대해 SF소설은 진지하게 묻는다. 영장류 복제 기술이 가능하게 되면서 SF소설과 영화에서 복제인간 '클론'에 대해 다루는 것은 이미 진부한 소재가 된 듯도 하다.
그런데 <나를 보내지 마>는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클론들이 헤일셤 학교에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기억의 형식으로 잔잔하고 아름답게 다루면서 인간과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클론들
작가가 클론의 성장 과정에서 끈질기게 매달리는 문제는 '기억'이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 그날의 분위기, 감각 그리고 그 가운데서 벌어지는 사건과 생각들이 기억 속에서 섬세하게 펼쳐진다. 장기 기증이라는 목적에 따라 죽음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삶에 대한 기억은 절박할 정도로 섬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들이 곧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작가는 그렇게 섬세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을 인간의 목적을 위해 수단시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그래서 이 소설 어디도 기증받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을 수단시 하는 인간은 세계 저 너머에서 삶을 영속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셈이다. 또다른 인간인 헤일셤의 교사들은 클론에게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너희는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야.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 안 있어 헤일셤을 떠나야 하고, 머지 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 146p
인간보다 인간적인 클론의 섬세한 기억
그런데 소설 속의 클론들은 운명에 순응할 뿐,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응과 복종을 내면화 하면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복종한다. 순응과 복종이 신념이 되면, 자발적으로 규제하고 검열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인간의 속성마저 그대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경험했던, 아직도 경험하고 있을지 모르는 검열과 통제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루시 선생님의 그런 대답을 듣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그런 건방진 질문을 한 데(우리한테 혹시 누군가에게 도끼를 휘두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격노해서 마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하건대 이후 며칠 동안 우리는 마지의 생활을 그야말로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밤마다 공동 침실에서 우리는 마지의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려 놓아 억지로 숲을 바라보게 했다. 그 벌이 바로 이런 잘못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p.124)
인간은 자기 세계의 규범과 질서를 전체로 규정하고 나머지를 소수화시킨다. 2017년 <남아있는 나날>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국인이다. 6살에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30대까지 한번도 일본에 가본 적이 없었던 그는 성장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마치 그가 일본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영국인들은 그들 소수화시키고 그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던 것이다.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타자화 하는 인간
지방 읍면 단위의 소도시에 가보면 외국인들이 참 많다.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눈에 최소한 그들은 이방인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고,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하지만 끝까지 다른 사람이다. 우리 사회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필요할망정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을 소수화하고 타자화한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좀더 분명해진다. 교육현장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행복과 자유와 이상을 미래를 위해 유예할 것을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행복하고, 사랑하고, 고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며 살 것을 강요한다.
성적이라는 기준에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여 자신의 역할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한다. 마치 '흡연이 사람의 몸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을 끼치는지 사진으로 보여 주는 수업'(p.124)을 들으며 담배를 멀리하는 것이 개인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클론이 인간에게 건강한 장기를 제공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장치이듯, 이 사회에 싱싱한 장기를 끝없이 새롭게 제공해 주기 위해 교육이 무제한 동원되고 있다면 지나친 억지인가.
인간은 무엇이고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공한다. 인간을 위해 태어나고 성장하는 인간 '클론'은 인간을 위한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면서 어떻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말없이, 열심히 수행한다. 의문을 품기도 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저항하지 않고 네 번의 장기 기증을 통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며 죽어간다.
전작 <클라라와 태양>에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AF(Artificial Friend) 로봇 클라라는 자신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친구들 앞에서 2세대 AF로봇의 부족함에 대해 불평하는 친구의 모습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상대를 의심하고, 배반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괴롭힌다. 인간을 배반해서 인류를 파멸로 몰고가는 SF 영화 속 이야기는 어쩌면 인간의 거짓된 욕망, 배신, 이기심, 악행의 속성에 의해 스스로 파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이 일상언어가 되고, AI와 챗GPT에 의한 정보 소통이 일상생활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속성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고뇌할 줄 알고, 실수할 수 있고, 좀 많이 부족하고, 실패하는 속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한다.
완벽하게 세계를 이해하고 정답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세상을 인공지능을 통해 추구하면서도, 이를 부정하는 것에서 인간다움의 속성을 찾는 모순 속에 인간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두 세계가 공존할 것이 분명하다. 이 세계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과 추구 앞에 AI와 인간이 함께 놓이게 되는 순간이 머지앉아 올 것은 분명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니, SF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참으로 진지하기 그지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 [마음 닿는 곳에 잇는 길]에도 실립니다. SF와 관련하여 심완선 작가의 <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학교도서관저널, 2023) 덕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SF 해설서이면서 입문서입니다. SF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