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대도를 펼친다
수운 선생은 자신의 동학에 대한 정론은 완전 무시되고, 사사로운 요술이나 부려 백성을 현혹하는 사람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을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수운 선생은 온갖 고문과 악형, 조작된 심문 내용, 사술의 주문, 반역의 검무, 서학으로 모함, 제자들이 고문에 견디지 못해 허위자백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하늘이거늘 어찌 하늘을 고문하는가. 하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수운은 결국 육신은 죽지만 정신은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경상 감사 서헌순 등 심문관이 묻기를, "최복술의 사술과 역모 죄는 백일하에 드러났다.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양곡과 무기는 어디에 숨겼느냐? 이제 모든 사실을 고하고 죄를 인정하라" 하였다. 수운 선생은, "나는 잘못한 것도 죄도 없소이다. 내가 주창하는 것은 백성들을 지키고 살리기 위한 '보국안민, 척양척왜,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도의를 펼치는 것이외다" 하였다. 이에 "저놈의 입을 막아라!" 하며 고함을 지르자, 힘센 병졸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주리와 곤장, 압술 등 온갖 악형을 가한다.
덕을 온 천하에 펴라
백성을 널리 구제하라
나라를 바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서양과 일본세력을 거부하여 물리쳐라
수운 선생의 공초 즉 심문과 고문이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순간 천둥 벼락 소리 즉 우렛소리가 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에 감사와 목사, 현감 등 입회한 관리는 물론 수운 선생의 제자들까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상 감사 서헌순이, "아니, 어디서 나는 소리이기에 어찌 그리 큰가?" 하니, 나졸이 고해 말하기를, "죄인의 넓적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하므로 즉시 심문을 멈추고 형리에게 하옥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운 선생의 제자들이 다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도 기록된 공술서는 수운 선생의 정론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사술과 무속은 물론 광신도 집단으로 왜곡하여 공술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반역의 모함으로 식량과 병장기, 군대 편성 등에 대해서도 캐물은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사설(邪說)을 퍼트렸다는 것으로 천신 즉 귀신이 강림하여 서양인이 온다느니, 공을 세워 고관이 된다느니, 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동학의 중요 가르침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경전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고 간간이 제자들의 진술내용을 악용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동학의 핵심이라는 주문(呪文)에 대해서도 수운 선생이 지은 <동경대전>, <논학문(동학론)>에 자세히 설명한 것은 하나도 거론하지 않고 도술 즉 사술을 부리는 주문처럼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날 마지막 심문이 끝나고 해가 저물자 곽덕원 도인이 밥상을 들고 찾아가 수운 선생의 모습을 뵙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수운 선생은 곽덕원에게 두 가지 심부름을 부탁한다. 하나는 해월에게 관으로부터 붙잡히지 않게 멀리 도망가는 것이요, 하나는 시 한 수를 전하라는 것이었다.
높이 날아 멀리 나아가라
수운 선생이 곽도인에게, "최경상(최시형)은 지금 대구 성 안에 있는가? 곧 병사들이 잡으러 갈 것이니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고 전하라. 만약 잡히면 동학의 미래가 위태롭게 된다. 힘들겠지만 나의 부탁을 꼭 전해야 한다"고 하였다.
곽덕원은 "해월 선생은 이미 떠났습니다. 차후 뵙게 되면 반드시 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운 선생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시 한 수를 읊으며, 이 시를 반드시 해월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高飛遠走고비원주, 높이 날아 멀리 나아가라"
수운 선생이 후계자 해월에게 남긴 마지막 명교는 멀리 도망가라는 뜻도 있지만, '천도 동학을 높이 올리고, 멀리 전파하라'는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수운 선생의 최후 유시는 자신의 무죄를 강조하며, 순도로써 정신적인 힘이 되어 천도 동학을 마른 기둥처럼 영원히 떠받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수운 최제우 선생 최후의 유시)
燈明水上無嫌隙 등명수상무혐극
柱似枯形力有餘 주사고형역유여
등불이 물 위에 빛나니 전혀 틈새가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
1864년 3월 2일 의정부에서 최제우 사형에 대한 판결을 결정한 내용을 살펴보자.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 3월 2일 임인 1번째 기사 1864년 청 동치(同治_청나라 연호) 3년 동학 두목 최복술(최제우)을 참형에 처한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동학(東學)이라고 일컫는 것은 서양의 사술(邪術)을 전부 답습하고 특별히 명목만 바꿔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조기에 천토(天討_하늘이 악인을 친다)를 행하여 나라의 법으로 처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 중국의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白蓮敎)라는 도적들처럼 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자세한 전교는 간악한 것을 밝혀내고 요사스러운 것을 들추어내어, 그 죄상을 낱낱이 밝히면서도 죄 지은 자를 가엾게 여겨 보살펴주는 뜻을 베푼 것이므로 참으로 엄숙하게 여기고 우러르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조사한 문건에서 단정한 내용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최복술(崔福述)이 그들의 두목이라는 것은 자기 자백과 사실 조사를 통한 분명한 결정이 있으니 해당 관찰사에게 군사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은 가운데 효수(梟首_목을 베는 극형)하여 뭇사람들을 경각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강원보(姜元甫) 등 12명은 분등(分等)하여 형배(刑配)하고, 그 나머지의 여러 죄수들은 도신에게 등급을 분등하고 참작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이 자들은 서로 물들여 도당(徒黨)을 이룬 죄로 조율(照律)하면 처음부터 쌍방과 얕음과 깊음의 구별이 없으니, 전부 처분을 내린다고 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대왕대비의 덕을 받들어 억지로 차등을 두었습니다. 바른 학문이 밝아지지 못하고 그릇되고 바르지 않는 말이 횡행하므로 혼란을 좋아하고 재앙과 화난을 즐기는 무리들이 거짓말과 헛소문을 퍼뜨려 점점 젖어들고 익숙하게 하여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경상도(慶尙道)는 우리나라에서 노(魯_산동성山東省, 공자孔子의 출생지) 나라와 추(鄒_주周대의 나라 또는 고을 이름) 나라와 같이 음악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던 고장이었으나, 이런 일종의 요사스러운 무리들이 나타나서 많은 도당(徒黨)을 집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야말로 음·양(陰·陽)이 사라지고 자라나는 기회와 같은 것입니다. 삼가 어전에 나가 임금을 직접 대하는 자리에서 따로 진달하려고 합니다만, 먼저 이런 내용으로 조정의 지시를 시행하는 논의의 자리를 갖은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수운 선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작과 날조에 맞서
성인의 초연함에
삼가 머리가 숙여진다.
그래서 선생을 가리켜
대선생, 대신사, 대성인
만인의 스승이라 일컫는다.」
도탄에 빠진 세상 건지려 했건만
경상 감사 서헌순은 경주 죄인 최복술(최제우) 등에 대하여 그 전말을 엄격히 심문하여 밝혔다는 것을 조선 정부에 보고하였다. 공술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역시 동학의 경전은 물론 주요 사상 그리고 수운 선생과 도인들의 활동까지 완전 날조하여 조작한 내용으로 결론지었다. 심문과정은 이미 밝혔으므로, 심문의 결론에 대한 의견서와 대왕대비의 지시를 소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요사스러운 공부를 하고 있는 무리들을 철저히 신문하니 최복술(제우)은 본래 되지 못한 인간으로서 감히 황당한 술책을 품고 주문이란 것을 꾸며내어 요망스러운 소리를 선동하였습니다. 위천주(爲天主)라는 설에서는 서학을 배척한다고 하였지만 도리어 간사한 서학을 포덕문에 답습하였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꾸며 은밀히 나쁜 마음을 실현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궁'자 약은 비방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검무를 추면서 흉악한 노래를 퍼뜨렸으며 평온한 세상을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고 은밀히 도당을 모았으며 걸핏하면 귀신이 가르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술법은 바로 한나라 때 누른 두건을 쓴 도적들인 황건적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누구에게나 돈과 곡식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으니 그 무리는 바로 한나라 때 미적(米賊)과 같은 것입니다. 법이 더없이 엄한 이상 조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강원보(姜元甫) 등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였고 정석교(丁錫敎) 등도 엄중하게 처결해야 할 것입니다. 전석문(田錫文) 등은 모두 범죄의 실제적인 증거가 없으니 응당 참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괴수가 체포되는 바람에 진상이 속속들이 다 드러났으므로 열거하여 보고하면서 공손히 처결을 기다립니다. 장경서(張敬瑞) 등에게 엄격하게 감시도 하고 염탐도 하라고 신칙하였습니다.
지시하기를 "대왕대비에게 보고하면 응당 지시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 왕조는 2월 29일에 서헌순의 장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대왕대비가 지시하기를, "이단의 요사스러운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이고 있으니 실로 교화가 밝지 못했음을 탄식하게 된다. 이번 경상도 옥에 갇힌 여러 죄수로 말한다면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우둔하여 더 말할 여지조차 없고 이단이란 지목도 과분하다. '죄를 다스리는 데만 치우치지 말고 불쌍히 여기라'는 훈계는 바로 이런 무리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미쳐서 몰려다닌 점은 뭇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한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상 감사의 심문 보고에 대해서는 묘당(廟堂)에서 제의하여 처결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운,
얼마나 억울하셨을까!
수운 선생을
심문조사 보고한 이들이나
대왕대비의 지시나
백성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정반대로 보면 된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옛말에
성인(聖人)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